[시] 지우개(이선영)
너와 섞여 내가 지워지는 이 참상
지우개 / 이선영
내 몸속에 선명하게 새겨진 너를,
내 몸속 생생한 기록이었던 너를,
오래도록 내 행복과 불행의 주문(呪文)이었던 너를
오늘 힘주어 지운다
사납게 너를 지우며
너와 섞여 내가 지워지는 이 참상
이제야 깨닫는다
너를 지우는 일은
몸이 부서질 듯
나부터 지우는 일임을
지워야 할 너의 자취만큼
내 몸엔 베어먹힌 사과의 퀭한 이빨자죽!
종이에서 그득 털어내는 나의 부재(不在)
-『일찍 늙으매 꽃꿈』,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