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우진 Mar 22. 2021

놀이터로 출장 가는 남편

출장비는 아이의 웃음소리입니다.



육아휴직 중 남편의 주 업무는 가사와 둘째 아이 전담, 나는 첫째 아이 전담이었는데 2월은 아직 쌀쌀하여 산후조리를 이유로 첫째 등하원남편이 맡아주었다. 특히 하원 시에는 아이가 놀이터에서 2시간 이상 놀기 때문에 업무 중 출장이나 다름 없었다.


동생이 태어난 후 스트레스가 높아진 딸은 부쩍 감정 기복이 심다. 특히 놀이터에서 놀지 못하는 날은 유독 집에서 짜증 냈기 때문에 평화로운 저녁 시간을 위해서는 남편의 놀이터 출장이 필수였다.


딸은 5살이 되면서 그네도 혼자 타게 되고 제법 어려운 구조물도 아빠와 연습 끝에 혼자 완주할 수 있게 되었다. 활동적이다 못해 역동적으로 놀이터를 누비는 딸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여 남편은 쫒아다니기 바빴다.


그중 딸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일명 '상어 놀이'인데 놀이터 구조물 위에 아이들이 있고 밑에서 아빠가 상어(혹은 괴물)가 되어 잡으려 하면 안 잡히려고 도망 다니는 놀이다. 처음엔 딸과 몇몇 친구들이 같이하던 놀이가 시간이 지날수록 구경하던 초등학생 몇몇까지 합류하는 바람에 남편은 쉴 틈 없이 뛰어야 했다.


그렇게 친해진 딸 친구들은 남편만 나가면 상어 놀이든 공놀이든 같이 놀자고 하거괴물이 나타났다며 남편을 때리고 도망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놀이터에서 함께 노는 아빠는 남편뿐이었기 때문이다.




남편 출장은 해가 긴 여름에는 3시간 이상 이어져 매일 육퇴 후 맥주를 안 마실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맥주를 마시며 그날의 놀이터 이야기를 공유하 의외로 우리 또래의 부모인데도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진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 '여자 치고'잘한다.
'공주'는 그런 거 안 해도 돼.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면 돼.

'공주'니까 '보호'해줘야 해.
여자 친구는 '약하니까' 살살해.

여자애라서 '차분'하네.


위의 말들은 딸아이가 놀이터 구조물이나 운동기구에서 능숙하게 놀 때, 남자아이들과 로봇 놀이를 할 때, 실컷 뛰어다니다 잠시 블록놀이에 집중했을 때 딸이 들었던 말들이다.(비슷한 맥락의 말들이 너무 많아 생략한다.)


우리 딸은 공주를 좋아하긴 하지만 차분하기보다는 활동적인 편이라 뛰어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신체발달이나 운동능력도 또래 남자아이들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편이어서 지켜줄 필요가 전혀 없다.


딸아이는 그저 자신의 성향대로 즐겁게 놀뿐인데 그런 소리를 계속 듣다가 행여나 '우먼 박스'에 갇힐까 염려스러웠다. 어떤 행동을 해도 '여자'라는 틀에서 해석해버리는 순간 아이만의 특성은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 남자아이들 역시 울면 안 된다거나 씩씩해야 된다거나 여자를 지켜주고 보호해야 된다는 소리를 들으며 '맨 박스'에 갇히고 있다. 남자아이가 내성적이고 차분해서 걱정이라분들까지 있었다.


사회가 성별이 아닌 한 아이의 특성 그대로를 바라봐줄 때 아이들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없이 자랄 수 있. 이는 곧 타인을 편견 없이 대하고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하기 위한 기본자세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른들이 먼저 나서서 '자는', '자는'이라고 콕 집어 정해주려 까. 그분들께 박한아 작가의 '남자아이가 아니라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를 권하고 싶은 심정이다.


비단 아이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 남편이 육아휴직을 했으니 육아를 하는 건 당연한 일임에도 놀이터의 다른 엄마들은 어쩌다 나를 만나면 남편을 칭찬하며 '집에서도 많이 도와주시죠?'라고 묻곤 했다. 그때마다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거죠.'라고 답하려다 '분담해서 하고 있어요.'정도로 부드럽게 말하는 일 꽤 수고롭게 느껴졌다.


엄마들이 먹을거리들을 자주 나눠주셔서 남편이 수박이나 아이스티를 챙겨가 보답하면 그 또한 대단한 일인 것처럼 여겼다. 본인들이 매번 챙겨 오는 수많은 음식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닌 것을 단지 '남자'가 가져왔다는 이유로. 




나는 왠지 모르게 산후조리가 다 되었다 싶었을 때에 밖에 나가는 것이 망설여졌. 남편이 마주했던 일들을  내가 겪게 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이 되어서였다.


그런 마음들을 남편과 나누며 이야기하다우리가 그들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만 보고 있다는 걸 반성하게 되었다. 분명 이웃분들은 친절하시고 배려심 깊으신 분들인데 여러 부분을 염두에 두지 않고 편협하게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 역시 잘못이라는 생각 한 것이다.


그래서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가끔씩 내가 출장을 나가고 이웃분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불편한 상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절히 대답해가는 요령도 익히고 은근슬쩍 성역할에 관한 내 생각을 표현하기도 했다.


정작 나의 놀이터 출장 결재를 반려한 것은 딸이었다.  '엄마는 동생 낳아서 힘드니까 쉬어'라 아빠 호출했다. 아빠 상어가 더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나마 가을부터는 육아휴직을 한 다른 아빠도 계서  남편의 놀이터 출장 업무가 조금은 수월해진 것이 다행이었달까.




딸아이는 실컷 놀고 들어와서 목욕할 때 그날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을 아빠가 이야기처럼 들려주면 무척 좋아했다. 남편은 딸의 친구들이나 친구 엄마들 성대모사를 해가며 이야기하고 그게 너무 재미있까르르 웃는 딸아이의 웃음소리 거실까지 울려 퍼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안 했더라면 하루에 2~3시간씩 놀이터에서 놀아줄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 추억 또한 쌓이지 않았을 테지.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소중한 추억이 쌓였고 그 자체가 우리 가족에게는 행복이었다.



엄마 껌딱지인 첫째가 유일하게 아빠를 먼저 찾는 시간. 


"아빠, 놀이터 가요!"


이전 08화 남편이 같은 병을 얻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