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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May 06. 2021

68세에 학사모를 쓴 엄마

엄마에 비하면 나는 아직 멀었다.





2019년 봄, 엄마는 늦깎이 대학생이 되셨다.

엄마는 66세였다.


내가 열 살 남짓이었을 때, 어느 날 엄마는 한복을 입고 이상한 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을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 놓으셨다. 주부대학(지금으로 하면 주부 대상 문화강좌 같은 것) 졸업사진이라는 말에 뭔지는 모르지만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네모난 모자를 쓰고 있는 엄마가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그 액자는 더 이상 벽에 걸리지 않았고 내 기억 속에서도 혀졌다. 그러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엄마는 학사모를 쓰고 있는 나의 사진을 벽에 걸으셨다. 그때 생각났다. 엄마의 그 사진이. 내 졸업사진을 걸으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엄마는 책을 좋아하셨다. 특히 시를 좋아하셔서 줄줄 외는 시도 여럿이었고, 소설이나 자기 계발서도 즐겨 읽으신 뒤 가끔씩 무언가를 쓰시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커보니 읽다 보면 쓰고 싶은 말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는데, 엄마도 아마 그러셨겠지.


엄마는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옛날 시골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것만도 쉽지 않아 대학은 갈 수 없었다며 말끝을 흐리시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래서 엄마의 학구열은 늘 진행형이었다.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하실 때도 얼마나 열심히인지 단번에 1차 시험 합격하셨다. 여러 사정으로 2차 시험은 볼 수 없으셨지만. 그때 엄마의 수험서에 공부의 흔적이 빼곡하여 깨끗한 내 교과서를 보며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하신 후 일을 쉬신 적이 없었는데 나와 오빠가 한 해에 결혼을 한 후, 갑자기 대상포진을 앓게 되자 그 김에 일을 그만두시고 귀농하셨다.


두 자식의 결혼 준비가 많이 힘드셨던 건지, 마음이 울적해 기력이 쇠해지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엄마가 드디어 쉬신다니 나는 내심 잘되었단 생각을 했었다. 30년 넘게 일하셨으니 좀 쉬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는 귀농의 재미를 다 알기도 전에 어딘가 또 일을 나가셨고,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첫 손주가 태어난 후에도 손주 돌봄보다는 일을 택하셨다. 난 그런 엄마의 선택이 존경스러웠다. 아이를 같이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서운함도 조금 있었지만, 아직도 자신의 일을 우선하는 엄마가 그냥 왠지 멋있었다.






그러던 엄마가 2018년 겨울에 다시 일을 그만두셨다. 이제 65세, 정말로 쉬셔도 된다고 여행도 다니시고 하고 싶으신 것 하시라고 찬성에 대찬성을 했더랬다.


그러길 두 달 후. 엄마는 지방의 한 대학에 입학했노라 하시며 사회복지과에 다니시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면 그렇지, 엄마가 쉬실 리가 없지'하면서도 딸아이에게 할머니가 대학생이 되었다고 전하는 내 목소리에는 엄마에 대한 존경과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나는 다시 엄마의 주부대학 졸업사진이 떠올랐다. 엄마는 20살부터 내내 대학 가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하셨구나. 그래서 주부대학이라도 다니셨던 것이겠지. 자식들 키우느라 정신없이 일하신 45년의 세월을 지나 드디어 대학생이 되신 엄마를 생각하니, 그간의 엄마 마음이 짐작되어 가엾기도 하고 이제껏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끝내 도전하신 것이 감탄스럽기도 했다.


남편은 엄마의 대학 입학 선물로 컴퓨터를, 나는 전공서적이 들어갈 큰 숄더백을 사드렸다. 새내기가 되어 교정을 거닐 엄마 생각에 내가 다 감동스러워 눈물이 나는 그런  있었다.


그렇게 입학 첫 해를 엄마는 즐겁고도 열심히 학교에 다니셨다. 가끔씩 뵐 때면 일하실 때보다 더 신나 보이셨고 여느 대학생처럼 학점 걱정을 하시는 마가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2학년 때는 코로나 19로 인해 수학여행도 못 가시고 수업도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면서, 남은 1년의 대학 생활은 첫 해만큼 즐겁게 하시지는 못하셨다. 학교에 가고 싶은데 못 가서 너무 속상해하 엄마학교 가기 싫어하는 젊은이들(그 옛날 나포함) 모두 반성해야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 해 여름, 엄마는 보육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여름 내 어린이집으로 실습을 나가셨다. 엄마가 꿈꾸던 국어 선생님은 아니지만,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일에 기쁨을 느끼셨다. 엄마가 작성한 실습일지보여주시는데 어찌나 정성스럽고 빼곡하게 쓰셨는지 본원 교사도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2021년 2월.

엄마는 30여 년 전 써보았던 네모난 모자를 다시 쓰고 진짜 대학 졸업사진을 찍었다. 코로나 19로 졸업식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쉽. 학사모를 쓴 엄마와 사진 한 장 꼭 남기고 싶었는데.





취준생의 대열에 올라서게 된 엄마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보육교사 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실습일지와 자격증만 덩그러니 남았다고 생각하니 내가 다 속상해서 눈물이 났다. 엄마가 그 실습일지를 유품으로 나에게 물려준다고 하실 만큼 최선을 다하셨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이제 어떻게 하시려나 걱정하는 사이 엄마는 대학 3학년에 편입하신다고 연락을 해오셨다. 졸업 후 취업이 안되면 내 복직을 위해 잠깐 둘째 아이를 맡아준다고 하셨었는데...  나의 복직은 저 멀리...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엄마 잘했어! 하고 싶은 공부 더 해"라고 쿨(?)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었다. 또 얼마 후, 엄마는 요양원에 사회복지사로 취직을 했다고 하셨다. 엄마의 에너지는 정말 끝이 없는 것일까. 그렇게 엄마는 주 5일을 사회복지사로, 토요일엔 대학생으로, 일요일엔 영락없는 농부로 살아가시는 중이다. 이거야말로 진정 리스펙! 





엄마의 졸업 사진을 보며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퇴직을 꿈꾸기만 하고 대책은 없는 게으른 나에게 엄마의 졸업 사진은 반성과 용기의 마음을 동시에 갖게 한다. 


엄마는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마다 예전에 읽으셨던 자기 계발서의 제목을 좌우명처럼 스스로 되뇌셨다. "행동하지 않으면 실패도 성공도 없다." 진짜 그 말이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엄마의 수많은 도전이 훌륭했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유명하고 거창한 말보다 이 말을 자주 생각해야겠다.


엄마처럼만 살자.



어버이날이 다가온다. 낳고 기르시는 것뿐만 아니라 평생토록 당신의 삶 그 자체로 자식에게 가르침을 주신 엄마에게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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