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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Apr 14. 2021

원망을 소망으로 바꿔 듣는 사랑

그 시절 아빠의 사랑법



작년 여름, 첫째 아이가 저녁을 먹다 말고 느닷없이 발가락을 보여주었다. 가만히 보니 발가락 사이땀이 나서인지 허물 벗은 부분들이 있었다. 나는 무심코 "양말을 안 신어서 그랬나"하고 혼잣말하듯 했는데 갑자기 딸아이가 양말을 안 신겨준 엄마 때문에 이렇게 됐다며 자못 심각하게 원망의 마음을 표현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나는 순간 서운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 왜 내가 원망을 들어야 하나. 코로나 19로 가정보육을 하다 속 좁은 엄마가 된 건가.


자기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에게 남편이 "여보, 어디 아파?"하고 묻자, 참았던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사실 나는 지난날의 나를, 그리고 아빠를 떠올리고 있었다.






중학시절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IMF 직후 고등학교에 입학한 해에는 가정형편 더욱 어려워졌다. 부모님은 어렵게 자영업을 하시다 그마저도 아빠가 빚보증을 잘못 서 바람에 폐업을 한 상황이었다. 


새로운 일을 찾아 근근이 살아가는 중에 할머니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셨고, 딸만 일곱에 유일한 아들이던 아빠는 간병을 하시느라 결국 새로운 일도 찾지 못하셨다.

별다른 재주 없이 공부만 착실히 하던 나는, 과외와 학원의 도움을 받는 친구들을 따라가기가 버거웠. 가정 형편을 잘 알기에 학원에 다니고 싶다는 말은 차마 꺼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EBS 강의를 녹화했다가 주말이면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며 혼자 공부를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학 강의를 듣는데 아무리 리플레이를 해서 보아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짜증을 내다가 방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몇 시간 뒤 며칠 만에 시골에 계시던 아빠가 집에 오셨다.


나는 집에 오신 아빠를 보자마자 아빠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느냐고, 왜 변변한 대학에 가지 않았느냐고 원망아내고야 말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 것도, 내가 학원에 못 다니는 것도 아빠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아빠는 영문도 모르고 딸아이가 쏘아붙이는 말을 멍하니 듣고 계시다 점차 표정이 굳어지며 화를 내셨다.


그때 당시에는 아빠가 화내시는 것조차도 미웠는데 금 생각해보면 진짜 화가 나신 게 아니라 무안해서 그러셨던 것 같다. 아빠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줄곧, 나에게 화내신 적이 없으셨기 때문이다.


엄마와 함께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할머니 댁과 우리 집을 오가는 길에 할 수 있는 일로 화물 배달를 알아보시는 중이셨는데... 그렇게 애쓰는 와중에 딸이 내뱉은 원망의 말은 아빠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겠지.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하셨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도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하는 아빠와 달리 나는 한동안 아빠를 대하기가 불편했다. 미안함과 부끄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있는 원망이 뒤섞인 못난 마음 때문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녹화 강의를 듣다가 짜증을 내며 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신 엄마는 나 몰래 우셨다고 했다. 아마 내가 아빠에게 원망의 말을 쏟지 않았더라도 엄마가 아빠에게 나의 그런 상황을 얘기하고 같이 고민하셨을 것이다. 그런 고민만으로도 미안해하시고 속상하셨을 텐데 내 기분만 생각하고 원망의 말을 내뱉 바람에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결국 화물 배달일을 시작하신 아빠가 낡지만 큰 책상을 싣고 오셨다. 그리고 내키지 않으면 안 써도 된다는 것을 계속 강조하시며 "그 책상에서 공부한 학생이 좋은 대학을 갔다"더라 하셨다. 


남이 버린 것이라고 딸이 싫어하면 어쩌나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하시는 눈치였다. 나는 아빠가 실망하실까봐 책상 좋아 보인다고, 잘 쓰겠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제서야 아빠는 활짝 웃으시며 내 방에 책상을 들여놓고 정성껏 닦아주셨다.


책상을 옮기고 닦는 아빠의 모습에서 학원은 못 보내지만, 딸의 작은 책상이라도 바꿔주고 싶으셨던 아빠의 사랑이 보였. 아빠는 의 어리석은 원망을 소망으로 바꿔 들으시고 당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딸을 위한 일을 찾으셨던 것이다.






아빠 마음에 대못을 박아놓은 내가 에게 들은 아주 사소한 원망속상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자격이 나에겐 없다.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는 그 상투적인 말이 너무도 진리라는 것을 부모가 되어서야 믿게 되었다. 


아빠에게 아직도 그 사건에 대해 사과드리지 못했다. 앞으로도 못할 것 같다. 그 이야기를 입에 올리기도 힘들 것 같아서이다. 죄송하다는 말을 마음으로 하는 대신, 사랑한다는 말은 더 많이 표현하며 살아야겠다.


사실, 애정표현은 언제나 아빠가 더 많이 하시는 편이다. 딸아이가 할머니에게 "엄마랑 저 중에 누굴 더 사랑해요?"라고 물으면 엄마는 망설임 없이 "우리 손녀"라고 말하지만, 아빠는 똑같은 질문에, "할아버지는 내 딸을 사랑하지."라고 하시니까.


첫째 딸아이가 생후 50일쯤 되었을 때, 집에 오셔서 처음 손녀를 안아보신 아빠다음날 보내신 문자메시지 잊을 수 없다.


너를 본 듯 손주를 보고와
입가에 흐르는 미소를 감출 수 없구나
엄마를 닮아 똑똑하고 아빠를 닮아 강직한
우리 손주가 될 거다  
현명하게 키워 나라에 동량이 되도록 해라
너를 사랑하듯 네 딸도 사랑할 거다
고생하는 내 딸 사랑한다.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알 수도 따라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딸로서도, 엄마로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딸아이에게 엄마가 이렇게 힘들게 널 키운다생색그만 내고, 딸아이의 원망을 소망으로 바꿔 듣고 사랑을 듬뿍 주어야겠다.


우리 아빠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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