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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씽씽 Mar 02. 2022

표류의 시작(4)

감정기복, 상실감과 그리움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가니, 짜증이 따라왔다. 그 짜증은 영준과 동료들에게 향했다. 신애가 자리를 비운 회의 석상에서 영준이 말했다.


  “다들 신애 때문에 힘들지 않아?”


  동료들은 침묵했다. 침묵은 곧 수긍이었다. 그 말을 다른 동료에게 전해 들은 신애는 배신을 당한 사람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 그도 그럴 게, 영준이 다른 동료들로부터 비판을 받을 때 그를 감싸준 건 신애였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신애는 자신이 이토록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벌게졌다. 창피했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료들에게 자기감정을 뱉어내고 다닌 꼴이니 말이다. 앞으로 어떻게 동료들을 봐야 할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 누가 뭐라 해도, 영준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적어도 신애에게 먼저 진지하게 이야기해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는가. 신애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걸 꼭 모두가 있는, 그리고 신애는 없는 회의 석상에서 말했어야 했나.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그 말을 전해 들어야만 했을까. 영준과의 관계는 진작부터 금이 가있었지만, 이번 일로 신애는 영준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깨진 신뢰는 일에도 영향을 주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내 작업물 쓰는 거."


  영준이 말도 없이 신애의 작업물을 같이 일하는 다른 디자이너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 디자이너는 신애의 작업물을 활용해 또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우연히 그 결과물을 보게 된 신애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따져 물었다. 어차피 회사 내에서 공유한 거니, 크게 뭐라 할 일은 아니었지만. 한마디 말도 전하지 않을 만큼 사이가 멀어진 것 같아 그게 서운했다. 하지만 영준은 다르게 해석했다.


  "아티스트처럼 굴지 마."


  영준은 대답했다. 그 한 마디에 많은 말들이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었다. 회사에서 '아티스트'처럼 작업물을 개인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아티스트를 꿈꾸는 신애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신애는 자리를 비우고 화장실에 들어가 펑펑 울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언제부터 그와 이렇게나 멀어진 걸까. 두 사람의 거리는 테이블 하나만큼 가까웠지만, 둘이 서로에게 내뱉는 말은 상처를 주는 말 뿐이었다. 신애는 짧은 시간 동안 느꼈다. 이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음을. 거울을 바라보았다. 못난 마음을 품고 있는 여자 하나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울상을 한 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책을 뒤로하고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그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신애는 다시 영준에게로 돌아와 앉았다.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영준은 신애가 울었음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아...”


  짧은 한숨이 모든 걸 설명했다. 잠깐의 정적이 둘 사이를 무겁게 짓눌렀다. 보이지 않는 견고한 벽이 생겨버렸다. 둘 사이는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웠지만 결코 서로에게 닿지 않았다.


  “그만두겠습니다.”


  신애는 회의 시간에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퇴사를 선언했다. 그녀가 회사를 그만두는 게 꼭 영준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안한 신애의 마음을 붙잡아둘 곳이 없어진 건 영준 때문이겠다. 굳이 영준에게 미리 회사를 그만둘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신애 자신조차도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영준은 놀란 눈치였지만, 이미 말은 내뱉어진 후였다.


  신애를 비롯한 대부분의 멤버들이 회사에서 나왔다. 대표인 인숙이 회사 목표에 어울리지 않는 멤버들의 퇴사를 권유한 탓이었다. 영준은 충동적으로 퇴사를 결정한 신애를 나무랐다. 신애 때문에 팀이 깨졌다고 탓하는 말투였다. 영준은 신애를 붙잡지 않았고, 신애도 그런 영준을 아쉬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회사에는 영준, 그리고 지민이 남았다. 신애는 패배했고, 결국 영준을 빼앗겼다.


  회사는 그만두었지만, 회사 근처에 구한 집은 그대로였다. 성수동. 신애와 영준은 같은 동네 주민, 언제든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에 있는 사이였다. 곳곳에 영준과 함께한 추억이 깃들어있었다. 취하도록 마셨던 꼼장어구이집, 인스타에서 핫하다고 간 카페, 맥주 이름만 보고 골랐던 수제 맥주집, 깔깔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지나쳤던 마트 앞 도로, 일하려고 노트북 들고 갔다가 결국 이야기만 나누고 왔던 서울숲 공원, 늦은 밤 같이 거닐었던 학교 옆길, 마지막으로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서 엉엉 울었던 일식집까지. 어느 곳을 가든 영준이 떠올랐다.


  신애는 일부러 회사 건물을 피해 삥 돌아갔다. 혹여 성수동 근처에서 영준을 우연히 만날까 하루하루를 마음 졸이며 살았다. 저 멀리 영준과 비슷한 뒷모습을 가진 사람만 보여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숨겼다.


  그러다가도 어떤 날은 혹시나 멀리서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그의 오피스텔 앞을 천천히 걸어 지나가기도 했다. 매일 당연하게 보던 사람을 한 순간에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상실감, 그리고 밀려드는 그리움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다.


  ‘멀리서라도 봤으면…….’

  ‘아니, 마주치지 않았으면…….’


  반대되는 두 마음을 품은 채 두 달 여간 성수동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다.


  “보고 싶다.”


  입 밖으로 튀어나온 진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커진 마음은 방향을 잃은 채 곪아갔다.






신애의 만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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