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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씽씽 Feb 28. 2022

표류의 시작(3)

감정기복, 질투와 허전함

  질투는 심해졌다. 그리고 고백을 차인 뒤로 서운함이란 감정이 추가되었다. 일이 많아지면서 신경 써야 될 게 많아진 신애는 한껏 예민한 사람이 되었다. 혼자 회사에서 잠을 자거나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이젠 그 곁에 영준은 없었다. 신애 혼자 야근을 할 때, 먼저 퇴근을 하려던 영준이 물었다.


  "편의점에서 뭐라도 사다 줄까?"

  "됐어요."


  뾰로통한 대답이 돌아갔다. 영준은 내심 생각해서 해준 말인데, 기분이 퍽 상했다. 그는 등 돌려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사무실을 떠났다. 신애가 영준에게 툴툴댈수록 영준과 지민은 더욱 가까워졌고, 신애는 더욱 까칠하게 영준을 대했다. 바보 같은 일이었다. 더 잘해주지는 못할망정, 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그러니 당연 지칠 수밖에.


  "너 이렇게 태도가 변한 거, 고백한 뒤부터인 것 같아."


  영준은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신애의 태도 변화를 눈치 못 챘을 리가 없다. 신애는 영준의 말에 속으로 뜨끔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사적인 마음을 공적인 일에 끌어들이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다. 영준이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다른 멤버들이 그의 여성차별적인 발언과 행동을 문제 삼았다. 여성 멤버이자 페미니스트인 해은이 그것을 고발하는 내용을 몇십 페이지 되는 문서로 작성해 대표님께 전달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영준 모르게 신애의 귀에 들어왔다.


  ‘영준님이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한 적이 있던가?’


  신애의 입장에서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사실여부를 떠나 신애는 이 문제가 이런 식으로 해결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영준과 해은이 이야기를 나눠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애는 해은의 편에 있는 멤버들에게 고발서 대신 일단 대화로 풀어갈 것을 설득했다. 그리고 영준에게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렸고, 그 이야기는 대표인 인숙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결국 해은이 영준에 대한 고발서를 인숙에게 전달했다. 몇 시간 뒤, 인숙은 모든 멤버를 회의실로 불러 모았다. 인숙은 고발서의 내용을 거론하지조차 않았다. 일의 내용을 떠나 멤버들 간의 일이 이런 방식으로 처리되었다는 것에 실망하고 모두를 나무랐다. 회사의 존폐까지 거론됐다. 긴 회의 끝에 결국 모두가 마음에 상처를 입은 채로 일이 일단락되었다.


  신애는 회사 화장실에서 마주친 해은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제가 바뀐 것처럼, 영준님도 잘 이야기해보면 바뀔 수 있을 거예요.”


  진심이었다. 신애는 페미니즘에 대해 무지한 여성이었고, 해은을 보면서 어느 정도 배운 게 있었다. 영준도 변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지만, 해은의 생각은 달랐다.


  “그럴까요? 신애님은 영준님을 좋아하니까 그런 거예요.”


  신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올바른 행동을 한 것일까, 그녀의 말처럼 짝사랑이란 마음 때문에 뭔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혹시 내가 영준님에게 이 일에 대해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여성의 인권을 변화시킬 한 걸음을 사랑에 눈이 멀어 신애가 가로막은 것은 아닐까? 생각은 거기에까지 도달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신애는 영준의 편에 섰고, 해은은 몇 달 뒤 회사를 나갔다.


  신애와 영준은 그 일로 잠깐이나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듯싶었다. 겉으로는 잘 지낸다고 생각했던 다른 멤버들에게 배신당한 느낌이 든 영준은, 이후 행동을 조심했고 신애에게만 진심을 내비치는 것 같았다.


  “이제 아무도 못 믿겠어.”


  밤늦게 회사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둘의 모습은, 전과 달리 즐거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불이 꺼진 어두운 사무실 안, 스탠드 조명이 둘을 비추었다. 둘의 모습 뒤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둘이 예전처럼 끈끈한 동지애를 느낀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고발서 멤버에 포함되지 않았던 지민과 영준은 여전히 친했고, 신애는 계속되는 야근과 지민에 대한 질투로 점점 더 예민하고 날카로워졌다. 영준에 대한 마음이 커질수록, 느끼는 감정의 폭도 크게 요동쳤다.


  회사 행사를 위해 여수로 가는 KTX 안. 지민과 영준, 그리고 신애가 마주 보는 좌석에 앉았다. 영준은 피곤한지 테이블에 팔을 뻗고 그 위에 머리를 기대 엎드렸다. KTX는 쿠궁쿠쿵 흔들리며 빠르게 달렸고, 차창 밖 풍경 또한 정신없이 지나갔다. 적막이 감돌았다. 신애는 말없이 영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는 듯이 오랜 시간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리운 건 왜일까.


  퇴근하면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던 편의점을 지나치면서, 영준의 오피스텔 방에 불이 켜져 있는지 살폈다. 이제 둘은 퇴근 후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다. 더 이상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지도, 볼링을 치러가지도 않았다. 자전거를 함께 탔던 한강공원에 신애는 부쩍 자주 가게 되었다. 혼자, 그리고 밤에. 반짝이는 한강 다리와 대비되는 검은 물살. 그게 다시 신애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애는 들고 간 맥주 한 캔을 꼴깍꼴깍 마셨다.


  좋아하는 마음이 질투와 허전함으로 채워지면서 신애의 마음에도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신애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할 때면, 일부러 차가 오는 도로에서 아슬아슬하게 건너곤 했다. 차에 치여 죽길 바라는 듯이. 그럴 때면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몸도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회사 행사 뒤풀이 때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사람들과 대화하기는커녕, 혼자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당장 이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결국 양해를 구하고 먼저 집에 갔다.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가는 어느 밤.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신애는 전에 느껴보지 못한 느낌을 받았다. 죽을 것만 같았다. 죽겠구나 싶었다. 곧바로 아무 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역사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먹었던 것을 다 게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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