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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씽씽 Feb 23. 2022

표류의 시작(1)

감정기복, 스며드는 과정

  대학교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새로운 일자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스타트업(설립한 지 오래되지 않은 신생 벤처기업)이라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하는 일도 어떤 일인지 확실하게 감이 오지 않았지만, 신애는 단숨에 면접을 보겠다고 했다. 지금 있는 곳에 미련 따위 없기 때문이었다. 


  회사는 모노톤의 깨끗한 3층 건물로 1층은 카페, 2·3층은 코워킹스페이스(여러 스타트업 회사들이 공간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인 곳이었다. 신애는 카페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작업한 그림과 만화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면접은 차를 마시면서 편안한 느낌으로 진행됐다. 회사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올려 펀딩을 진행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 주제가 꽤 민감하고 무거운 주제라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만화(삽화)’라는 보조도구가 필요하다고. 그게 신애를 면접장소로 부른 이유였다. 이야기를 나눈 후, 언제부터 나올 수 있냐고 물었다. 당장에라도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2주간의 인수인계 기간을 둔 후에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 뭐 인수인계할 거리도 없었지만, 이제 ‘전 직장’이 될 곳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새로 들어갈 회사에서는 2주 뒤에 있을 콘텐츠 회의 때, 프롤로그 만화를 보여줄 것을 요청했다. 첫 출근하기 전부터 중요한 일이 주어진 것이다.


  2주는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해방이다.”


  방송국을 떠나는 날, 그녀는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한강을 건넜다.


  그렇게 신애는 성수동의 한 스타트업에 들어갔다. 집도 뚝섬역(성수역 옆)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회사 근처로 옮겼다. 이번 집도 근처에 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후, 잘 하자.”


  라는 생각과 함께 들어간 첫 회의.


  "이런 것도 못 해요?"


  신애는 첫날부터 회사 동료로부터 타박을 받았다. 회의 준비를 위해 TV에 노트북을 연결하는 걸 쩔쩔매던 신애에게 그가 한심한 듯 바라보며 한 소리였다. 그는 그러면서 HDMI 잭을 가져와 연결했다. 신애는 무안해졌다.


  그의 이름은 '영준'. 25살인 신애보다 6살은 많은 31살인 데다 사회경험도 그 나이 또래보다 훨씬 많은 유능한 사람.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안경을 고쳐 쓰는 그가 신애는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 처음 본 신애에게 유일하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고, 웃어주지 않은 사람이었다.


  ‘너무하잖아. 친절하게 알려줄 수도 있는 걸.’


  그녀는 그가 야박하고 냉철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무안함에 빨개진 얼굴이 식기까진 시간이 조금 걸렸다.


  첫 회의를 무사히 마쳤다. 다행히 신애의 만화를 본 멤버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영준을 제외하고는. 그다음으로 신애가 작업해온 로고도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뜨뜻미지근하게 군 건 영준뿐이었다. 신애는 생각했다. 저 사람이랑은 친해지기 어렵겠다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야근을 하던 신애, 그리고 영준이 회사에 남아있었다. 신애는 회사 탕비실에 있던 영준에게 그날 그린 삽화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가 어떤 냉철한 평가를 내릴까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영준은 신애의 그림을 턱을 괴고 골똘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신애님, 이런 포즈는 어때요?”


  영준은 양손을 올려 신애의 두 손을 맞대어 잡았다. 깍지를 끼고 서로 맞잡은 두 손에 신애는 온 신경이 쏠렸다. 긴장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두근거림으로 바뀌었다. 영준은 이런 그녀의 마음을 알기나 할까? 그녀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했다.


  ‘우리가 이 정도로 친했던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들뜬 모습으로 자신의 그림에 포즈를 제안하는 그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삽화를 그리는 일 다음으로는 캠페인 영상의 PM(프로젝트 매니저)을 맡았다. 그리고 영상을 기획하기 위해, 두 달여간 관련 강의를 듣게 되었다. 영준이 추천한 강의였다. 영준은 관심 있는 강의라며, 신애와 함께 강의를 듣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신애와 영준은 퇴근 후 지하철을 타고 성수에서 합정으로 넘어갔다. 합정에 도착한 뒤엔 간단히 저녁을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강의를 들었다. 강의가 끝나면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회사 일에, 주말엔 대학원까지 다니는 영준은 피곤했는지 꾸벅꾸벅 졸다 신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 신애는 편하게 자라고 어깨를 살짝 내려주었다. 처음처럼 영준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강의를 들으러 가는 퇴근 후의 그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두 달이 지나고, 영준과 함께하는 강의가 끝이 났다. 아쉬운 마음을 느낄 새도 없이 신애는 외부 영상팀과 함께 영상 제작을 하면서 정신없이 바빠졌다. 야근에 외근에 일이 넘쳐났다. 더운 여름날 한강 땡볕 아래에서 촬영한 날, 촬영본이 엉망이라 회사 대표님한테 까인 날, 녹음이 제대로 안 돼 멤버 앞에서 엉엉 울었던 날, 그래서 영준이 신애 대신 영상팀에게 한 마디 해주었던 그날까지. 고되기는 했어도, 영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뿌듯하면서 기뻤던, 반짝반짝 빛나던 순간들. 그리고 그 곁에 함께 해주었던 멤버들.


  신애는 그런 멤버들이 좋았다. 회사 근처 공원인 서울숲에 가서 일을 하거나, 아침에 같이 스쿼시를 치러 가고, 한강공원에 가서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볼링을 좋아하는 영준 때문에 락볼링장에 가서 새벽까지 내기 볼링을 치기도 했다. 그렇게 신애는 어느새 장난도 칠 만큼 멤버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친남매 같아.” 


  그리고 첫 만남과는 다르게 멤버들 중 가장 친해진 건 영준과 신애였다. 회사에서 집이 가까운 둘은 퇴근을 거의 밤 12시쯤에 하곤 했는데, 영준이 기다려줄 때도 신애가 기다려줄 때도 있었다. 집 가는 방향이 같은 둘은 함께 걸었다. 신애의 집은 영준의 집보다 조금 더 걸어가야 있었다. 영준의 오피스텔 건물에 다다랐을 때, 영준이 신애에게 말했다.


  “아이스크림 먹고 갈래?”


  둘은 영준의 오피스텔 1층에 있는 편의점 야외 의자에 앉았다. 오피스텔 건물 위로 둥근달이 떠있었다. 여름밤, 입에 문 아이스크림이 입 안에서 달콤하게 녹아 사라졌다.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손에 든 채, 한밤중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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