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기복,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일은 이전 회사와 비교하면 더없이 즐거웠다.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스스로 진행해나가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드는 일이 신애에게 너무 잘 맞았다. 특히 캠페인을 위해 기획한 영상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할 땐, 고되고 힘들기는 했어도 완성된 영상을 보면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촬영하고 보니 영상이 엉망이라 회사 대표님한테 까이기도 하고, 실수로 녹음이 안 돼 멤버 앞에서 울기도 했지만. 더운 여름날 햇볕이 내리쬐는 한강공원에서, 에어컨이 없어 푹푹 찌는 방 안에서 촬영을 하고, 밤새 그림을 그리고 편집을 하던 날들. 그때가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빛났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곁에 멤버들과 영준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신애는 영상 일을 하면서 컴퓨터를 바꾸기로 했다. 영준은 맥북을 추천했다.
“맥북, 내가 할인해서 살 수 있게 도와줄게. 대신…….”
영준은 씨익 웃으며 각서 한 장을 내밀었다. 각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신애는 영준에게 5번의 밥을 산다.]
신애는 겉으론 뭘 다섯 번이나 사냐고 투덜거렸지만, 속마음은 어쩐지 싫지 않았다. 그때 그 종이에 ‘주신애’ 세 글자를 적었을 때부터였을까. 그렇게 신애는 퇴근 후 영준과 밥을 먹고, 락볼링장에서 내기 볼링도 치고, 두 사람이 한 대의 자전거를 타면서(영준이 신애 뒤에 타긴 했다만) 시간을 보냈다. 그와 있을 때면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서로 이야기도 잘 통했다. 신애는 그와의 시간이 재미있고 좋았다. 그가 좋았다. 어쩌면 내어준 건 이름 세 글자뿐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들어와.”
퇴근 후, 영준은 자신의 자취방으로 신애를 초대했다. 신애는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LP판이네요?”
신애는 어색함에 곁에 있던 LP판을 집어 들었다. ‘Daft Punk’라는 가수 것이었다. 그 이름을 외우기 위해 신애는 몇 번을 혼잣말로 되뇌었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고 싶었다. 영준의 자취방은 그의 감성으로 채워져 있었다. 화이트톤의 벽과 나무로 된 가구들, 하얀 이불과 베개, 초록잎의 큰 화분, 따뜻하고 밝은 느낌의 커튼, 매일 그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할 길쭉한 전신 거울과 그의 예전 직업을 짐작케 할 음악장비들까지. 그의 일상이 담긴 자취방에 들어와 있다니. 신애는 속으로 ‘꺄악-’ 소리를 내지르며 기뻐했다.
신애는 행복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회사에서도, 퇴근 후에도 볼 수 있다니.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늘 가까이에 있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니까. 그녀가 들어오기 전까진.
"안녕하세요. 새로 들어온 지민입니다."
지민은, 만화창작과를 나온 신애보다 만화를 잘 그렸다. 적어도 신애 스스로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녀는 인스타에 회사 만화를 올리는 업무를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신애는 어쩐지 위기감이 들었다. 자신의 분야를 자신보다 더 잘하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랄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게다가 사람들을 웃기는 재주도 있어서, 멤버들과도 잘 어울렸다. 유난히 영준과 코드가 잘 맞았다. 사실 신애는 그 부분이 제일 눈에 거슬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래도 영준은 신애와 가장 친했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이거 영준님 거죠? 제가 챙길게요."
신애가 들고 있는 영준의 가방을 지민이 낚아채듯 가져갔다. 회사 동료들과 다 같이 북토크 행사를 갔을 때의 일이었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영준의 가방을 챙긴단 말인가. 그것도 굳이 신애가 잘 들고 있는 영준의 가방을. 신애는 당황스러웠다. 최근 영준과 지민이 많이 가까워지긴 했지만, 가방까지 신애가 들면 안 될 만큼, 그 둘의 사이가 가까워진 걸까. 지민과 영준이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신애의 눈에 들어왔다. 신애는 못 볼 꼴을 본 것 마냥 고개를 돌렸다.
하필이면 영준과 신애의 업무적 거리도 멀어졌다. 거기에다가 회사에서 사수급인 영준은 새로 들어온 지민을 챙겼다. 지민과 영준은 곧잘 같이 다니게 되었는데, 그때 신애는 깨달았다. 자신이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질투심이 일렁였다.
"난 네 거가 아냐."
질투가 화를 불렀다. 영준은 난감한 듯, 또 약간은 질린 듯한 뉘앙스로 신애에게 말했다. 뚝섬역 근처 학교 옆 밤길을 둘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너희 둘이 유치원생도 아니고."
너희 둘은 신애와 지민을 말했다. 그는 신애를 타일렀다. 제발 잘 지내라고. 그도 그럴 게 신애와 지민은 동료들 눈에도 보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를 사이에 둔 줄다리기랄까. 묘한 신경전이 서너 차례 있었다. 신애는 지민과 나름 잘 지내보려고도 노력했다.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지민이라고, 신애는 그렇게 생각했다. 유치원생처럼 떼를 쓰면 그를 가질 수 있을까. 이미 멀어지는 게 느껴져서, 불안해서 떼를 쓰는 아이처럼 신애는 투덜댔다.
신애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영준이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으니까. 신애는 둘이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미 그가 알고 있을 마음을 내보였다.
"제가 영준님을 좋아해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덜덜 떨리는 말과 손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뒤로 영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다만, 영준은 신애도 지민도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 그 말만이 귀에 맴돌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신애도 진작 알고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영준은 신애를 토닥이듯 살며시 안아주었다. 거절의 의미였다.
‘거절의 포옹이라니, 잔인하네.’
신애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맞장구쳐주며 들었다.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남매처럼, 친구처럼 남는 것으로. 그렇게라도 남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 그와 틀어져, 그를 오래도록 그리워할 날이 올 줄은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