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시 수업)
'쉽게 씌어진 시'(윤동주) 詩
윤동주 시를 가르칠 때면 나는 항상 아이들에게 내가 처음으로 산 시집에 대해서 말하곤 한다.
내가 처음 산 윤동주 시집시장 초입의 작은 동네 서점, 빽빽하게 숲을 이룬 듯 책꽂이 책들이 나를 감싸고 있음을 느끼며 한 줄을 차지하고 있는 시집이 꽂혀 있는 칸 앞에 서서
선망하며, 글을 잘 쓰고 싶은 욕구를 숨긴 채,
찬찬히 책을 펼쳐본다.
'시집 읽기 부' 동아리에 가입했다는 들뜬 마음을 가지고 처음으로 시집을 산 날 나는 그날의 설렘을 잊을 수가 없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시집을 소유했다는 기쁨, 누구의 명령이나 타인의 생각이 아닌 나의 자유 의지로 동아리를 선택하고, 시집을 고른다는 것은 열네 살 소녀에게 작은 해방감과 독립심 비슷한 것을 맛보게 하는데 그걸로 충분했다.
이게 뭐라고 거창하게 , '자유 의지'니, '해방감'이니, '독립심'이니 우습기도 하다만 교과서나 자습서, 문제집 이외의 것을 보거나 무언가 활동하는 것을 쓸데없는 일로 생각한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나는 공식적인 학교의 활동을 인정받은 행위를 그것도 내가 원하는 시집을 사고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우선 아이들에게 시집을 본 적이 있는지, 사본 적이 있는지, 자신의 의지로 시를 읽어 본 적이 있는지 물어 본다. 나의 질문이 발화가 되어 여기저기서 저마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다. 대부분 사본 적이 없다고 하지만 시집은 봤다며, 자신의 의지로 시를 읽어 봤다며 이야기하는 아이를 만나면 반갑다. 이런 아이들에게 내가 처음 산 윤동주의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이야기한다. 뭔가 거창한 이야기가 나오겠지 기대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
"내가 윤동주 시집을 산 이유는 시인 소개가 되어있는 첫 페이지에 윤동주 사진을 보고 샀다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면 아이들은 교과서에 실린 사진을 보며 그럴만하다고 수긍하며 웃는다.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 사실 윤동주의 잘생긴 얼굴이 시집을 보게 만들었지만 그 시집을 산 이유는 '시가 순수하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열네 살 소녀가 느낀 시의 순수함이란 뭘까?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진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時代)처대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아이들이 소리 내어 시를 읽고 난 후 난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다. ' 밤비가 속살거리'는 시간은 어떤 시간일까?, 왜 하필 밤일까?, 왜 하필 비가 내릴까?,
나는 시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시인이 왜 그 시어를 쓰게 됐는지 묻는다.
시인은 허투루 시를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기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글에 독작가 오래도록 머물도록 하기 위해,
그래서 독자인 우리는 왜 이 시어를 썼는지 생각하고 찬찬히 보고 또 보며 시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
다시 열넷 살의 나로 돌아가면, 나는 윤동주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보자마자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나의 삶에서 해 본 적 없는 생각과 마음이 나에게 쏟아지며, 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줬다. 그리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화자의 여리고 순수한 마음에 나는 너무나 부끄러웠고 죄 많은 나를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참이나 시를 읽고 또 읽었던 어린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쉽게 씌어진 시'라고 하지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진 것은' 결코 시가 쉽게 씌어진 것이 아니란 말이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딸이 윤동주의 시를 보며
"엄마, 인생은 왜 살기 어려워요." " 그런데 시는 왜 쉽게 씌어져요."라고 물어봤다.
그때 나는 딸에게 답하지 않고 시를 계속 읽어 보라고 했다.
일주일 뒤 딸은 뜻을 알았다며, 사는 건 힘든 일인데 시가 쉽게 씌어지는 게 부끄러운 일 이라며 말했다.
그런 딸이 4학년이 돼서 얼마 전 내게 왜 윤동주 시에서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의 의미를 알았다며, 시인이 일제 강 점기를 살았다는 걸 수업 시간에 배웠다고 말했다.
문학 시간 윤동주의 시는 아이들에게 시험 범위에 들어가는 시 정도이지만, 그런 아이들에게 나는 말한다.
화자와 같이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가 너희 안에도 있다고.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나와 딸아이와 문학 수업을 듣는 아이들과
각자의 어두운 밤에서 시적 화자처럼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처럼
각자의 삶에서 세상을 달리 보며, 침전하지 않고, 등불을 밝혀 살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