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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무 Aug 06. 2024

바나나

어제까진 바나나였다.

 어제까진 분명 바나나였다.

그러나 현재는 바나나가 아니다.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싶었으나, 그 흔적조차 너무 처참하게 짓이겨졌다.

위안을 삼는다면 그 알맹이는 내 입 안과 식도를 거쳐 위로 지나 나에게 필요한 양분이 되겠지,




 어제 오후 2학기부터 나갈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갑자기 교육청에서 발령이 나서 계약 성사가 되지 않음을 말했다. 다시 구직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 타 지역에 사는 친구가 놀러 와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서로의 근황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받은 전화라 내 감정은 그 전화로 인해 착 가라앉으며, 그 찰나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향을 잃었다. 그리고 나침반을 돌려 방향을 찾듯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와 남편에게 말했다.

 "나 다시 구직 활동을 시작해야 해."

 셋 다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어서 우리는 이 삶을 언제까지 영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라는 화제로 방향을 틀어 이야기를 나눴다.

 '어제까진 분명 바나나였다.' 여기서 '분명'은 '명백하고 뚜렷하다', '어긋남이 없이 확실하게'이다. 그러나 삶은 명백하고 뚜렷한 것도, 어긋남이 없이 확실하게도 어울리지 않음을 나는 자각했다. '어제까진 바나나였다.'라고 나는 바꿔서 되새기고 있다. 알맹의 달콤함은 잊은 채, 나는 씹는 작용을 집중하며 짓이겨진 바나나 껍질을 바라보고 생각했다.

 '한 치 앞도 못 본다는데, 내가 그렇네.'

 그리고 짓이겨진 바나나를 아름답게 바라보는 일을 멈추기로 했다. 짓이겨진 건 짓이겨진 채로 바라보기로 했다. 내 마음이 짓이겨진 건 사실이니깐 말이다. 대신 바나나가 양분이 되길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나침반을 수십 번 눌러봤자 제자리임을 알기에 방향을 잡고자 애쓰는 일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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