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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현 Dec 31. 2021

초고가 원고가 되기까지

책을 내고 싶은 많은 사람들에게(5)

이 글도 벌써 5회째를 맞는다. 지난화까지 읽으셨다면 여러분은 출판계약을 따놓은 상태라고 가정할 수 있다. 이 시리즈가 가진 하나의 반전은 이 글은 책을 내는 순서대로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집필론을 쓰다가 다시 계약론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또 편집론을 쓰기도 할 것이다. 오늘은 집필론과 편집론을 조금씩 더해서 써보려고 한다. 


https://brunch.co.kr/@skytreesea/132

이 시리즈에서 가장 인기 없었던 글(뇌피셜)은 10만자를 쓰라는 두번째 글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시리즈를 보고 누군가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면, 이 모든 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글은 두번째 글이다. 이 글은 10만자를 써낼 수 없으면 책을 쓸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글자수를 매번 체크하지 않는 일반 독자의 경우 10만자가 대충 어떤 숫자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쓰고자 하는 내용은 10만양병설이 아니라, 10만자집필론의 보론 정도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https://brunch.co.kr/@skytreesea/130

먼저 word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 상자를 자주 눌러볼 필요가 있다. 이건 내가 쓰고 있는 글 중 하나인데 대략 A4 용지 30페이지 정도를 11포인트 글자로 꽉 채우면 3만자 정도가 된다. 즉 한 페이지에 약 1000자 정도라고 생각하고 쓰는 거다. 이렇게 쓰면 A4용지 100장 정도 쓰면 10만자가 된다. 사실 초고가 10만자면 책이 1권이 충분히 나오고도 남을 분량이다(이것 역시 두꺼운 책을 쓰느냐, 얇은 책을 쓰느냐의 차이이다).

한 장에 1000자라고 생각하고 쓴다

10만자를 쓰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아주 쉬운 방법 중 하나는 2500자 짜리 글을 40개 쓰는 것이다. 부담을 조금 줄이기 위해서 2000자 짜리 글을 40개 쓴다. 이렇게 생각해도 좋다. 예를 들어, 나는 '질러, 유라시아'(김창현 저, 푸른길, 2011 초판 인쇄, 현재 전자책으로만 구매 가능) 를 쓸 때 한 도시당 하나를 쓴다는 느낌으로 썼다. 그래서 총 52개의 도시를 다녀왔기 때문에 60개 정도 챕터가 된다. 특별히 나라를 중심으로 나누지는 않았지만, 라오스 여행 때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챕터를 썼다.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

방비엥에서 휴양

라오스의 경주, 루앙프라방


이 책을 쓰고 나서 한참이 지난 다음에 이런 이야기들을 덧붙였다.  


writer’s note 무슬림 이야기(2)


원래 <질러 유라시아>는 A4용지 200장 분량의 거대한 원고였다. 7개월동안 여행하면서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일기를 썼기 때문에 가능했다. 솔직히 이 기간동안에 여러분은 작가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이해할 필요도 있다. 처음 여러분의 원고를 접한 사람들은 "와, 이 원고 대단하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원고를 많이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시니컬한 반응에 노출될 것이다.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하다. 20대 대학생 때 내가 이 원고를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들었던 말들은 물론, "아, 대단하다.", "빨리 출판사 알아봐", 이런 소수의 반응도 있었지만, 시니컬한 반응도 무척 많았다. 


야, 요즘에 여행기 진짜 많아. 고생은 했는데 상품성은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양반이다. 그냥 대놓고, "재미 없다", "술마신 이야기다"(초고에 술 이야기가 좀 많긴 했다), "주제가 없다", "글 쓰는 법을 다시 배워야겠다.", 이런 반응이 많았다. 20대 대학생이 듣기엔 조금 과한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어쨌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작가로서 재능이 없구나.", "책은 류시화나 김영하처럼 진짜 특별한 사람들만 쓰는 거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원고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책이 나오게 된 것은 끝까지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준 친구 덕분이었다. 끝까지 원고를 출판하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고, 나중에 책 제목을 고를 때조차도 같이 고민해준 친구 덕분에 원고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이 글의 교훈이 "친구를 잘 둬야 출판한다"는 아니다. 책을 써보겠다고 초고를 써보기 시작한 사람들은 많다. 전적으로 나의 추측에 근거한 통계이다.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 중에서 대략 30% 정도는 책을 써보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 중에서 10명 중 2명 정도가 초고를 완성한다. 책을 몇 권 완성한 나도 10권 정도는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지금도 완성되지 못한 원고들이 저 멀리 어딘가에서 "살려줘"를 외치고 있다. 어쨌든 살아남은 6% 중에서 3명 중 1명 정도는 출판에 성공한다. 그렇게 되면 원래 출판을 하려고 했던 사람 100명이 있었다면 그 중 2명만 출판에 성공하는 셈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여기서 가장 어려운 것은 초고를 완성하는 확률이다. 10만자를 써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즉 2500자짜리 글 40개를 한 주제에 대해서 쓸 수 있으면 그 사람은 이미 작가이다.


책을 계약했다는 것과 초고를 완성하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먼저일 필요는 없지만, 초보 작가의 경우 제안서만으로 출판사가 기꺼이 책을 내주겠다고 선뜻 동의해주기 어렵다. 즉 초보작가는 자기가 써놓은 원고뭉치가 바로 무기이다. 원고가 없이 출판사 관계자를 만난다는 것은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같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원고를 써줄 사람이 필요한데, 초보 작가는 아직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다는 검증이 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책은 그냥 "글 덩어리"가 아니다. "팔리는 글 덩어리"이다. 경력작가는 자신의 포트폴리오, 즉 전작들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다면, 초보작가의 능력을 보여주는 건 초고이다. 


개인적으로 석/박사하면서 느낀 점이 있는데, 글 천재는 없다는 것이다. 운 좋게 나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초고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대단한 스펙을 가진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초고를 보면 엉뚱한 문장과 이상한 표현 투성이다. 조금 폭력적일 수도 있지만, 몇 번의 발표와 지적, 그리고 심사와 지도교수의 훈계를 거치면서 학위논문이 완성된다. 처음부터 자신이 쓴 학위논문보다 더 나은 글을 써서 내는 사람은 없다. 글을 쓰는 건 조각하는 과정과 비슷한데, 먼저 조각할 덩어리를 올려놓고, 그 다음에 깎아 나가는 거다. 즉 초고가 10만자면 그 중에 5만자만 남긴다는 생각으로 글을 수정한다. 표현을 고치고, 수정하고, 또 고친다. 그렇게 고치면 표현은 부드러워지고, 독자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만 남게 된다. 독자들이란 조금이라도 지루하면 이 책을 버리고 다른 책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는 간사한 존재들이다


예를 들어, "질러 유라시아" 여행기의 경우, 주인공은 동남아 여행을 하면서 며칠 동안 계속 맥주를 마신다. 덥기도 하거니와 음주단속 걸릴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고에 "오늘도 맥주를 마시고 잤다" 이런 표현이 매번 나온다면, 독자는 "쟤는 술만 마시나", "아, 지겨운 술 마시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된다. 술을 매일 마셨다 하더라도 매일 술 마신 이야기를 쓸 필요가 없다.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써야 한다. 만약 실수로 술마신 이야기를 여러 번 썼다면, 가장 근사하게 마신 원고만 남겨놓는다. 그러다 보면, 10만자를 쓰는 동안에 자신이 엄청나게 많은 말을 중언부언 썼음을 알게 된다. 일단 이 중복되는 이야기들만 걷어내도 원고가 읽을만 하다. 


당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당신이 만약 10만자를 썼고, 그 중 5만자만 남긴다는 생각으로 원고를 정리했다면, 그 원고는 어떤 주제가 되었든 한 번쯤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간에 글쓰기를 지도한다는 선생님 중 "짧게 써라", "간결하게 쓰라"는 것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 "짧게"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문장도 마냥 짧은 게 좋은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흐름이다. 흐름이 있으면 문장이 길어도 지루하지가 않다. 흐름 없이 중언부언 만연체라면 당연히 간결하게 쓰는 것이 낫다. 때로 간결하는데 쓴다는 충고를 잘못 받아들여서 문장을 지나치게 끊어놓아 맥이 턱턱 끊기는 글도 자주 본다. 


간결하게 쓰는 것보다는 중복 없이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중복이 없으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써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소개되는 글이 나쁜 글일 리가 없다. 


한줄요약: 10만자를 썼다면 5만자만 남긴다고 생각하고 글을 다듬는다. 


벌써 5편까지 왔네요. 많은 응원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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