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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현 Jan 01. 2018

<쇼코의 미소>를 읽다. 최은영 젊은 작가상 수상작

데미안, 토니어 크뢰거, 혹은 나 자신의 이야기

여행, 아니 출장을 가면서 읽을 수 있는 좋은 소설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쇼코의 미소'를 집어들었다.

먼저 나는 이동진의 '빨간 책방' 팟캐스트로부터 최은영작가의 이야기를

무려 2시간이나 들었으며, '쇼코의 미소' 줄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생각하면서 소설을 집어들었다.

첫번째 느꼈던 건,

단편치고는 생각보다 소설이 길다는 것이다.

저자는 쇼코의 이야기를 할 것처럼 하면서,

할아버지와 쇼코,

나와 할아버지,

나와 엄마,

나와 쇼코,

쇼코와 할아버지,

쇼코와 쇼코의 할아버지의

관계를 풀어낸다. 그러려면 당연히, 나, 할아버지, 엄마, 아빠, 쇼코, 쇼코의 할아버지의 캐릭터가 현실감 있게 그려져야 한다.

짧은 소설임에도, 특별한 스펙터클이 없는데도 분명 이야기는 힘있게 캐릭터를 전달해냈다.

특히 소설 속 '쇼코의 편지'를 통한 이야기의 전개는 스토리의 긴장감을 해주해줌은 물론,

따뜻한 아름다움을 선사해준다.

쇼코와 비슷한 친구가 누구에게나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분명 있었다. 끝없이 상대와 나를 비교하면서 상대가 나보다 어른스러운 점이 있으면 질투하고,

반대로 그 친구가 망가진다고 생각되면 은근히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그러나 결국 가까이 지낼 수 없게 되어버린 많은 사람들..

무엇보다도 '쇼코의 미소'는 말 그대로 쇼코의 미소를 여러 차례 묘사한다.

쇼코의 마지막 미소는 '서늘했다',

사실 글을 읽는 도중, "약간은 표현이 거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다.

그러나 첫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이 소설을 하나의 완전한 소설로 만들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지적했듯이,

어른을 위한 성장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솔직히 공감과 치유만을 목적으로 하기에는 작가가 작중화자를 지나치게 자기학대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는 사람이 느끼는 비애나 스트레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은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을 화자가 그렇게 인식한다고 말하는 순간,

작가는 이게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용감한건지, 아니면 조금 서툴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 구절은 공감되지만 동시에 너무 직설적으로 작가의 마음을 풀어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다.

그런데,

다 읽고 이렇게 따뜻한 느낌이 드는 소설은 오랜만이었다.

나에게도 몇 명의 쇼코가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지금은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는 '서늘하다'는 표현을 마지막으로 쓴 이유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이야기가 너무 '비현실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어찌나 적절한지 나는 다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다.

이래서 작가가 그렇게 말했었구나.

최근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담론을 만드는 단편을 본 적이 없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 이후로 처음?

이런 류의 소설은 사실 좀 지겹거나, 금방 "또 성장소설이군!" 하기 쉽다.

그러나 이 소설은 몇가지 참신한 설정을 통해서 그런 지루함을 극복한다.

그 중 하나가, 영어, 일본어, 한국어로 대화하는 주인공들..

물론 작가가 이 언어들을 원어로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국어가 주는 긴장이 있다.

그 긴장을 작가는 잘 이용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장치는 '죽음',

그런데 그냥 죽음이 아니라 '겹쳐진 죽음'이다.

이건 스포일러성에 가까우므로 그냥 이 정도로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쇼코의 미소'는 서늘했지만,

'쇼코의 미소'를 다 읽은 나의 마음은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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