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글자 산문 : 2022년 3월

by 푸른여우

머리말

여러 고민들 때문에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싶던 상황에서도 '하루만 더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그 고민의 발자취를 산문으로 남겨왔어요.


제목은 두 글자로 되어 있고(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말장난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요. 어쩌면 귀하의 마음에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 이따금 입이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드셔주세요. 혹은, 귀하의 하루 옆에 저의 하루를 놓아 보셔도 괜찮아요.


단지 오늘도 치열하게 산 당신은 안녕하시기를 기원하며. 푸른여우의 두 글자 산문, 2022년 3월입니다.




감사 3/1


어쩌면 제가 쓰는 글들이 예기치 않게 당신을 상처 입힐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렇게 계속 서툴게나마 문장을 만들고 있는 이유는, 첫 번째는 내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두 번째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이따금 어떤 문장을 필요로 할 것 같아서. 오늘도 부족한 문장이나마 끝까지 읽어주신 당신을 위해, 부끄러움과 감사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숙입니다. 그냥 그런 얘기.




소유 3/2


가진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주머니가 비어 있어도 자신만만하다. 반면에 자기가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금은보화를 가지고 있어도 늘 빈털터리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적어도 택하라면 나는 전자.




곁에 3/3


"나 지금 너무 무서워. 그러니까 곁에 있어줘."

그 말에 잠시나마 당신이 머물다 갔다. 그래서 나는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몰아 3/4


"네가 너를 비참하게 여기면, 그때부터 정말로 너는 비참해지는 거야. 네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대해 사과하지 마. 이런 나라서 미안하다든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너 자신을 몰아세우지 마. 괜찮다는 말은 너 자신에게나 해주고, 괜찮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에게 엿이나 날리렴."




수고 3/5


하루 종일 바삐 움직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오후 8시 지하철에서. 방금 지나온 번화가의 즐거워 보이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 반사 효과로 더 축 쳐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던 와중. "오늘도 수고했다." 노약자석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던 아저씨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고, 나는 분하지만 울컥했다. 아씨, 이런 데에서 위로받으면 안 되는데.




질문 3/6


"하나만 묻자. 너 나한테 왜 그랬어?"

"넌 너한테 왜 그랬는데?"




안부 3/7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래서 그냥 기다리려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고, 이따금 달달한 걸 챙겨 먹고, 웃긴 영상을 보고, 그러면서 '곧 괜찮아지겠지' 하고 기다리려고. 뭐라도 하라고 하면 더 힘들어할 테니까, 나는 그냥 나를 기다려주기로 했어, 조용히."




오늘 3/8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점차 초라해질 거야. 당신이 던진 그 말을 언제나 저주처럼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내일보다 덜 초라할 오늘의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젊은 상태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자신을 볼품없다고 여길 필요는 없었다. 그 어느 때든.




날씨 3/9


겨울에서 봄으로 막 접어들던 날, 며칠간 익숙하지 않은 바람이 불어 세상이 낯설게 보이곤 했다. 그러다가, 좋은 날씨네, 하고 누군가가 던진 혼잣말에, 바람은 서서히 따뜻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길을 걷다 말고, 나는 당분간 그 자리에 멈춰 섰는지도.




정정 3/10


"어제 미리 죄송하다고 메일 드렸는데... 욕먹으면 어떡하지?"

"아직 안 먹었잖아. 벌써부터 걱정하지 마."

"그럼 언제부터 걱정하는 게 나을까."

"어렸을 때 봐봐. 밥 먹고 나서 엄마가 약 먹으라고 하면, '약 먹을 시간인가 보다' 싶어서 그때부터 벌써 쓴 맛 나는 것 같고 그러잖아."

"그러면?"

"욕할 일이면 직접 오시겠지. 그러면 '아 욕먹을 시간인가 보다' 하고 그때부터 걱정해."




공복 3/11


지출의 거의 대부분이 식비로 나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배고픔을 느끼지 않으면 좋을 텐데, 언젠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허나 오늘 하루 중압감에 빠져 허우적대던 사람을 밤늦게 구해낸 것도 다름 아닌 그 배고픔이었다. 갑작스레 그는 잼 바른 식빵이 먹고 싶었다. 그래서 기숙사를 나와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동네 빵집 가판대 위에 놓인 식빵과 그 옆에 놓인 아기자기한 딸기잼 유리병들이, '먹을래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듯했다.




여행 3/12


"이 여행길의 끝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떡하죠?"

그 말에 그녀가 답했다.

"설령 끝에 아무것도 없더라도,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밝혀지더라도, 우린 괜찮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이 세상은 무의미해.'라고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 거잖아. 그것도 경험에 입각해서, 논리적으로.

-어쩌면 무언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따지면, 손해 볼 일은 없네?"




파동 3/13


어쩔 수 없이 남들이 던진 돌에 맞고만 있어야 할 때가 있다. 진짜 돌이든, 돌 같이 둔탁한 말이든, 우리는 예기치 않게 어딘가에서 상처를 입어 오곤 했다.

하루는 그의 마음에 멍 자국이 있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아파?"

"아프지."

우리는 집으로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

"근데 나는 사람의 70%가 물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해."

"뭔 소리야."

"호수에 돌 던지면 파동이 생기잖아. 그러니까 내 안에서도 새로운 흐름이 생길지도 몰라."

-그렇게라도 안 믿으면, 맞은 곳이 너무 아플 것 같아.

그가 멋쩍게 웃었다.




위로 3/14


'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나는 잘 모르겠어.'

고개를 숙이는 당신을 보았다. 당신은 면목 없다는 듯 이야기했고, 나는 그 말에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졌다. 당신은 겪어보지 않은 나의 일에 대해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나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젠가 3/15


중앙에 있는 블록을 하나 빼보니, 거기에는 '일상에서 느끼는 무료함'이라고 쓰여 있었다.

각도를 틀어 오른쪽 블록을 하나 빼보니, 거기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게 하나 둘, 감정의 블록들을 조심스럽게 빼내면서, 지금 느끼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의 구조를 확인해 보자. 무너지지 않도록.




봄이 3/16


"이번 연도는 봄이 되게 늦게 왔다고 생각했어. 아직도 침대 위에 전기장판이 납작 엎드리고 있거든. 그런데 뉴스 보니까 기상캐스터 언니가 '지난주처럼 이번주도 따뜻하겠습니다'라고 하던데, 지난주도 따뜻했어? 나한테만 봄이 늦게 왔나 보네."

"아직 꽃도 안 폈거든? 그니까 안 늦었어, 아무것도."




미안 3/17


"오랜만에 만나서 뭐라고 하게?"

"미안하다고 하게."

"관둬."

"그래도 뻔뻔한 것보다는 사과하는 게 낫지 않아?"

"그게 더 뻔뻔해 보여."

"미안."




러닝 3/18


아직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서 남고 싶어. 그래서 준비생, 연습생이라는 말, 그 단어들이 주는 파릇한 느낌에 중독되고 있었나 보다. 결말에서 자신이 실패를 맛보게 될까 봐, 아직 실패하지 않은 채 계속 뭉그적뭉그적 연습만 반복해가는 모양. 그래서 러닝 타임이 더 길어지기 전에, 이제는 자기를 '준비생'이라고 부르지 말기로 했다. 무작정 성인이 되듯, 무작정 그냥 가보게.


참고자료 : 고가 후미타케&기시미 이치로 - 미움받을 용기




물성 3/19


손에 닿는 사람과 사물들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점심에는 미음을 지어먹었다. 말과 움직임에 담긴 의미를 뜯어보다가, 또 마음대로 해석했다가, 이 사람이 날 싫어하나 생각했다가, 이 사람이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 노력 없이 기대하다가. 모든 것에 완벽해지고 싶어서,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어느 점심.

바쁜 저녁이 되어서야 그것들을 전부 잊어버렸다.

, 하마터면 또 정확하게 살 뻔했네. 저녁을 먹기로 했다.




잠잠 3/20


신생아처럼 자다가 일어나 보니 하루가 다 가 있었어. 옷차림은 아침에 잠깐 외출했을 때 입었던 옷 그대로. 보람찬 하루였어,라고 이야기하면 한소리 듣겠지만, 자기 자신에게 휴식을 주는 것만큼 보람찬 일은 또 없을 거라고, 그냥 그렇게 반박해보게. 안녕히 주무셨어요.




둥둥 3/21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단지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는 드라마를 봐야겠어. <스물다섯 스물하나> 첫 장면을 보고, 아직 아무 내용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울컥해버렸거든? 이 울컥한 부분들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 마음이 뭘 필요로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경과 3/22


아빠가 돋보기안경을 끼기 시작하셨다. 모든 것이 과거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 사실이, 무척이나 애틋했다.




구함 3/23


"아무리 뜻깊은 문장들, 뜻깊은 말씀들이 너의 앞에 놓이더라도, 너는 네가 몸소 느끼기 전까지는 아마 그것들을 마음에 새기지 못할 거야. 원래 사람들은 질투나 불안 같은 의미 없는 감정들에 더 친숙하니까, 좋은 말들은 한번 훑어보고 나면 금세 잊어버리겠지.

그래도 잘 보관해 놔. 비록 지금은 잊어버리더라도, 언젠가 그 말들이, 그 글귀들이,

네가 가장 위태로워졌을 때 너를 구해줄 거야."




빡침 3/24


"그냥 애정만으로는 안 되는 건가?"

"안 될 건 없어도, 좀 부족하긴 하지. 뭔가를 얻고 싶다면, 발전적으로 빡칠 필요는 있어."

"'내가 못한 게 뭔데!' 이런 거?"

"아니 그건 그냥 화풀이잖아. '나보다 낫네!'로 바꿔봐."

"나보다 낫네!... 뭔가 분한 느낌이 드는데."

"그치? 이제 너보다 나은 사람한테 배우면 돼. 차근차근."




아직 3/25


중요한 USB가 없어졌다. 청소하다 보면 나오겠지, 뒤늦게 방을 치워보고 있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는데, 그 사람도 아직 오지 않았어. 그렇게 아련한 생각이 들다가 이 글도 하루가 늦었다. 아직, 이라고 말을 꺼내는 사이에 시간이 또 갔다.




갈래 3/26


"있는 힘껏 손 뻗어보고, 그래도 닿지 못했다면 그때 다른 길 찾으면 되지. 해보라든지, 이제 와서 포기하냐라든지, 세상 사람들이 너에게 뭐라고 하든 너는 결과에 승복하고 깔끔하게 등 돌리면 돼. 그 대신 손을 뻗는 지금은 일생일대의 간절한 마음으로 뻗어줘. 어중간하게 뻗으면, 오랜 시간 동안 어중간한 채로 남아버릴 테니까."




의지 3/27


자리에서 일어나시던 할머니께서 힘겹게 나의 손목을 잡으셨다. 옆에서 부축하시던 분은 '거길 왜 잡어' 하면서 웃으셨고, 나는 손목에 가해지는 힘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만큼의 의지를 나는 가지고 있을까? 그 질문이 손목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바보 3/28


"바보라고 하는 사람이 바보야."

그 이유인즉슨, 남의 지식수준을 평가하는 사람만큼 본인의 무지함을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표적인 유행어로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등이 있다. 뛰어나신 교수님들은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대해 솔직히 모르겠다고 말씀하신다. 그게 멋있어서 따라갔던 나는, 오늘 아침 거울을 보고는 그만 '이 바보야' 하고.




박살 3/29


연이은 불합격 소식이 관자놀이를 지끈거리게 했다. 하지만 지금 느끼고 있는 여러 감정들이, 가보지 못한 어딘가로 나를 향하게 해 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또 쿠크다스 두께의 얄팍한 삶이 한번 박살 나고, 여느 때 그랬듯 깨진 파편들을 천천히 주워나갈 예정이다. 묵묵히 기대하며.




패션 3/30


멋있는 것만 하고 싶으면 가만히 있으면 돼.

그러면 적어도 볼품없는 일은 안 한 셈이니까.

근데 내 주변의 멋있는 사람들은,

생각해보면 다들 가만히 있지 않았어.




여우 3/31


"잘 지내고 있어?"

"어. 하루하루가 즐거워."

이렇게 답할 수 있을 정도로. 항상 즐거울 수 없는 게 일상이라지만, 그래도 매일 즐거운 일만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 바람.


참고자료 : 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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