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상냥해지기 위해서는 몇 스푼의 설탕이 필요할까?
<앨리스타임> 단편집
1.
"적당히 해."
나는 어느새 그런 말을 내뱉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사나운 말을 하게 된 것일까. 좀 더 부드러운 표현으로 돌려 이야기해도 좋았을 것이고, 아니면 그저 앨리스의 질문에 '그렇구나'하고 흘려들으며 이야기해도 좋았을 것이다. 앨리스가 상냥한 사람으로 자라나든, 설령 질 나쁜 사람으로 자라나든 이모인 나(그것도 스물네 살밖에 안 된)의 영향은 극히 적을 것임에 분명했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 겨우 나이가 두 자릿수가 된 아이를 혼낼 권리는, 나에게는 없다. 나는 이따금 이 아이가 내 자취방에 놀러 왔을 때 맛있는 과자를 꺼내 주고, 그것을 같이 먹고,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주며, 때때로 같이 낮잠을 자는 정도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혼낸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든 언제나 학대와 훈육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행위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만 한다. 더군다나 '적당히 해'라니, 이 거친 말이 앨리스가 자라면서 어떤 트라우마를 줄 것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말을 했다. '저는 좀 더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앨리스의 말에 대한 나의 반응이었다. 적당히 좀 해.
앨리스의 표정은 다소 변함이 없어 보였으나, 나에게는 그 아이의 얼굴에 어떤 당황의 기색이 드리운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황급히 이래저래 변명할 만한 이야기를 꺼내보려 했지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이 이상 상냥해서 어쩌려고, 같은 농담도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상냥함'이라는 단어가 여러 의미로 파생되어갔고, 나는 그것들이 견딜 수 없이 아팠다.
2.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해요, 하고 초등학교 때 내 또래 아이들은 전부 비슷한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어야만 했다. 수업 시간에 들려주는 전래동화는 언제나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결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도 그 웃음기 넘치는 등장인물들을 본받아 착하게 살기로 다짐했었다.
나는 그래도 자부하건대, 주변에서 철이 빨리 들었다고, 나름 효녀라고 불리며 컸던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이건 자랑이 아니라 고백이다. 그것도 아주 비참한 고백이다. 생일이 다가오면 '뭐 사줄까?'라고 물어오는 부모님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것을 마다하면서 '아냐 나는 안 사줘도 돼'라고 어른스럽게 얘기했다. 형편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것을 참을 줄 알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것을 참을 줄 알고, 인내, 그리고 또 인내. 인간이 되기 위해 백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으며 동굴에서 버티는 곰을 우러러보고, 도망친 호랑이를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내가 괜찮다고 열두 번째 생일 선물을 마다하는 때, 부모님은 전혀 기뻐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그것은 그들 이외, 즉 우리를 잘 모르는 바깥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른스러운 것일지 몰라도, 적어도 그들과 다르게 저명하셨던 부모님의 관점에서, 그것은 상냥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3.
세상에 저명한 어른은 생각보다 없다. 다들 나이를 먹고 어쩌다 보니 스무 살이 넘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한들 만족스러운 답을 얻기란 힘들다. 그들은 그저 그들이 얻지 못한 것들을 아이들을 통해 얻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반대로 자신에게 나름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아이들이 그대로 걷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가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에, 그들이 적어도 윗사람으로 있을 때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지하철에서 소리 내어 우는 아기를 보면 그들은 어김없이 더 크게 소리를 질렀으며, 이제 말을 할 줄 알게 된 아이들이 밖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것보다는 안에서 묵묵히 공부하는 것을 원했다. 이래저래 사회에 대해 불합리한 부분을 지적하는 아이들보다는 순종적이고 자신들을 잘 따르는 아이들을 원했다. 순종. 그들이 자주 쓰는 '착하다'는 말은 순종의 미화어다. 그들은 순종적인 아이를 원했다. 누구나 상하 관계에 있어서는 우위를 점유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고, 그들은 어린이란 결코 아랫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들 자신이 어린이의 위에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껏 조용히 하라고 할 수 있었고, 거기에 반기를 드는 아이들을 문제아로 여겼다.
하지만 결국 진짜 문제가 있는 아이들과 나름 정당하게 반기를 드는 아이들을 제외한, 수많은 아이들은 '착하다'는 소리 하나를 듣고 싶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참고, 속으로 삭이고 살았을까. 그들을 쓰다듬는 손이 얼마나 거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로. 그리고 그들이 이제는 마음대로 누구를 착하다 나쁘다로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들었을 때, 누군가는 상냥함을 무기 삼으려는 얄팍한 성인이 되었고, 누군가는 왜곡된 상냥함을 끌어안은 채 자신의 안쪽으로만 들어가 보려 하고 있었다.
4.
사람의 마음속에는 감정을 담는 풍선이 하나 있는데, 이 풍선은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마다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 이것이 터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기적으로 슬프다, 기쁘다, 힘들다 같은 말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아야 하며, 가급적이면 남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짐으로써 그 풍선의 크기를 줄여야 한다. 그 균형을 잡지 못하면 어느 순간 그 풍선이 터진다. 풍선이 터지면 높은 확률로 사건이 벌어진다. 그간 잠잠했던 사람이 이성을 잃고 폭언을 뱉기도 하며, 주방에 있던 칼을 들고 죄 없는 사람을 찌르기도 한다. 그러면 어디든지 바닥에 터지고 난 풍선 조각처럼 핏자국이 낭자할 수밖에 없다.
"미안해, 진짜."
물론 이건 진짜 극한의 상황을 예로 든 것이고, 대체로는 '내가 왜 그랬지'라고 나중에 후회할 만큼만의 분노를 내뿜고 사건은 끝난다. 나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서운한 감정을 분노로 바꾸어 내뿜은 적이 있었고, 그것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한 심한 모멸감이 들어서 이틀 동안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두려웠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을 꾸깃꾸깃 접어서 도로 집어넣으려고 애쓰다가 며칠을 울었다. 참자. 이대로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는 상냥한 사람이 되자. 사람이 사람과 만난다는 것,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서로를 흠집낼 수밖에 없다면 그냥 가만히 이대로 있기로 하자.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파괴 본능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는 서로를 의도치 않게 흠집 내더라도 계속 대화해야 했다. 가끔 주먹질을 하더라도 계속 부딪치면서, 그렇게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메꿔지지 않는 구멍에 서로의 손을 가져다 대며 선천적으로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을 달래면서 살아나가야만 했다. 그것을 내가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그런 상냥함으로, 적당한 상냥함으로, 내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서툴게 말이라도 꺼내볼 수 있었다면. 풍선이 터지고, 걷잡을 수 없이 후회가 밀려오기 전에, 내가 미리 미안하다고 얘기할 수 있었다면.
하지만,
뻥.
하고.
그렇게 많은 것들이 성인이 된 나의 속에서 여전히 은밀하게 터져나갔고, 지금도 많은 아이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냥함에 매료되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묵살하고. 이윽고 무엇이 자신의 감정인지도 잘 모르는 채로. 다시금 뻥, 하고 터졌다.
5.
전날 꿈에서 나는 앨리스와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물에 설탕이 얼마나 녹을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있었다. 약 스푼으로 설탕을 한 스푼 떠서 비커에 담긴 깨끗한 물에 넣었다. 잠시 동안 휘저으면 설탕은 비커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두 스푼, 세 스푼. 그렇게 어느 순간 n번째 스푼을 집어넣었을 때 물은 더 이상 설탕을 머금지 못했다. 같은 조에 있던 아이가, 최고로 달아진 그 설탕물을, 선생님의 주의도 무시하고 혀에 갖다 댔다.
으윽, 써.
쓰다고? 단 게 아니라? 너도 나도 약 스푼에 설탕물을 조금 떠서 입에 갖다 댔다. 그것은 확실히 쓴 맛이 났다. 학교가 끝나고, 앨리스와 나는 서로 사이좋게 손을 붙잡고 집으로 가면서도, 왜 거기서 쓴 맛이 났을지를 서로 이야기했다.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어느덧 우리는 거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로 걷고 있었다. 어둑한 골목길이 나오고, 나는 순간 무서워져서 돌아가야겠다고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모르는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ㅡ저기야.
그 아저씨는 신도림역으로 가야 하는데 길을 모르겠다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열두 살인 앨리스에게 물었다. 어린이는 무지하다. 다 큰 성인이 정말로 궁금한 것이 있을 때는 어린이에게 묻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이 어린이에게 뭔가를 물어본다는 것은 자신의 속셈을 감추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모른다. 앨리스는 상냥하게도,
알겠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열두 살로 돌아갔음에도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앨리스의 손목을 붙잡고 냅다 달렸다.
세상에는 착한 어른만 있는 게 아니란다, 숨을 헐떡이는 나에게 누군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착한 아이였던 자신을 떠올린다. 착해지고 싶었는데, 착해지고 싶었는데. 그리고 착해지렴, 착해지렴, 계속 손짓하는 이름 모를 나이 든 이들의 권유와 명령을 떠올린다. 그래서 나는, 적당히해적당히해적당히해 하고. 그들에게. 적당히 해, 제발 적당히 좀 해. 더더욱 상냥해지고 싶어 하는, 마음씨 착한 앨리스와 마음이 너무나도 아려오는 나에게, 그렇게 얘기하며.
"원래 음식 만들 때도, 적당히 넣는 게 제일 어렵다는데요."
그러나 싫은 기색 없이 애써 웃으며 얘기하는 성숙한 앨리스였기에, 나는 네 나이 때의 아이들이 으레 그래야 하듯, 상처 받은 마음을 솔직하게 얘기하라고. 자기를 학대하지 말라고. 차라리 나를 미워하라고. 내가 미안하다고...... 부질없는 이야기를 꺼내며, 그저 앨리스를 껴안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