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 고전古典 / 일본 최초의 재판소설, 재치 있게 욕심을 꾸짖다
★ 진짜 아버지는 두 다리 쭉 뻗고 잘 자고 있다. 그것도 모르고, 무슨 얼빠진 소리를 하고 있는지. (何の、真実のお父様は、つひ鼻の先きにびんびん達者に生きてござる。さうとも知らぬ聲殿、何を世迷言いふているのか。)(p.61-62, 자신의 아이가 죽은 당주와의 불륜에서 생긴 아이라고 주장하던 여인이, 죽은 당주의 아내가 청각장애인인 줄 알고 진실을 흘리는 장면에서)
국내에서는 『호색일대남』으로 유명한 이하라 사이카쿠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 최초의 추리소설, 『본조앵음비사』입니다. 현지 발음으론 '혼초 오인히지'라고 불리며, 일본 추리소설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작품인데요. 겉보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책처럼 보이지만, 내용은 하나의 시트콤을 보는 것 같아 재밌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보통 공부하는 사람이 이렇게 얘기하면 '그건 당신만 재밌겠죠'라는 소리를 듣습니다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도 재밌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번역이 있다면...!
이하라 사이카쿠가 남긴 에도 시대 추리소설
중국의 실제 판결 사례집인 『당음비사』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서 '당음棠陰'이란 팥배나무의 그늘을 의미하며 선정善政, 즉 여기서는 올바른 판결을 의미합니다. 사이카쿠는 이 당棠이라는 글자를 일본의 상징인 벚꽃桜으로 바꾸어, 일본만의 독특한 재판 사례집을 만들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당음비사』가 사실적인 성격이 강한 것과 달리 이 책은 허구적 성격이 강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책은 조닌町人이 주요층으로서 성장한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자본이 하나의 성공 기준으로 자리 잡던 시기에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 하는, 또한 욕심으로 남의 재산을 빼앗으려 하는 조닌들의 갈등과 재판을 소재로 다루고 있어요.
사이카쿠 또한 조닌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시의 조닌에 대한 은근한 비판을 소설 속에 담고 있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작품 내의 인물들은 때로는 친족으로부터 받은 땅을 꿀꺽하려고 하거나, 돈에 눈이 멀어서 부자에게 독을 마시게 하거나, 곤궁한 주인을 돕기 위해 모아놓은 돈을 훔쳐가 버리기도 합니다. 승려인 척 종교사기를 시도하기도 하고, 상을 당한 집에 찾아가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러 왔다'며 금전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발생한 갈등을 어전御前이 말끔하게 해결해나간다는 것이 수록된 단편들의 기본적인 서사 구조입니다.
다양한 인물, 다양한 추리로 만들어내는 해학적인 소설
총 44개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소설집으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이 조닌들이지만, 그들의 직업은 생선장수, 그릇 장수 등으로 다양하여 이야기를 다채롭게 꾸리기 위한 사이카쿠의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양하게 묘사되는 갈등만큼이나 어전御前이 송사를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도 탁월한 지혜, 악착같은 정보 수집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들이 일품입니다.
간통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의심되는 사람들끼리 피를 몇 방울 섞어본다든지(사실 이건 조선시대에서 실제로 행해진 과학수사이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정을 통한 사람들끼리의 피는 섞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끼리의 피는 분리된다고 믿었습니다.), 용의자 16명의 시녀 중 진범을 가려내기 위해 옷의 주름을 확인한다든지, 과학과 비과학을 넘나드는 사이카쿠의 상상력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특히 어전御前이 나름의 재치와 지혜를 활용하여 재판을 진행하는 과정이 솔로몬의 이야기를 연상시켜 인상적입니다. 예시로, 에피소드「四つ五器重ねての御意(네다섯 개의 그릇을 쌓아 올리게 한 의도)」에서는 그릇을 훔쳐간 도둑이 원래 자신의 그릇이라고 시치미를 떼자, 어전에서는 이 그릇들을 모두 흩뿌려놓고 두 사람에게 각자 그릇을 쌓아 올려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진짜 그릇 주인은 혹시나 그릇이 상할까 봐 천천히 쌓아 올리는 것과 달리, 도둑은 어떻게든 그릇을 차지하고 싶은 생각에 막 쌓아 올리면서 범인인 것이 들통납니다.
이렇게 검거된 범인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해학적인 요소들이 많이 가미되었는데, 그릇 사건의 범인의 경우 그의 옷을 벗겨서 피해자에게 주는 식으로 보상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해학적인 요소들은 이야기 전면에 걸쳐 있어 사이카쿠가 재판 소설을 흥미롭게 구성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도모했는지를 짐작 가능하게 합니다. 요컨대 사이카쿠는 御前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는 욕심을 재치 있게 꾸짖어나갑니다.
국내 번역본은커녕 일본어로 된 번역본을 얻기도 힘들었던 이 책을 재판 소설에 관해 조사하던 중에 우연찮게 발견했습니다만, 『호색일대남』으로 유명했던 사이카쿠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갈등을 말끔하게 해결해주는 명인을 원하는 마음은 어느 시대나, 어느 국가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에요. 그러고 보니, 당음비사는 조선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과연 국내에는 어떤 재판 소설들이 등장했을지 궁금해지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