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일기 쓸 시간이 없다는 거 얼마나 불행합니까? 솔직히 지금도 과제가 안 풀려서 기분전환할 겸 글들을 정리하고 있답니다. '두 글자 산문'은 제가 매일 겪은 일들을 소설처럼 쓰는 것이어서, 멋대로 휘갈긴 일기장을 남들 책상에 몰래 올려두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매번 죄송해지곤 합니다. 부디 읽으시면서 혹여나 부정적인 영향을 전달하지만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바람입니다.
(10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좀비>는 아직 비공개입니다.)
온도
"사람의 말에도 온도가 있어.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말은 따뜻하고, 어떻게든 상대방을 깎아내리려고 하는 말은 차가워. 도가 지나친 말들은 사람에게 화상을 입히거나, 동상을 입히기도 해. 그럴 때 아마 너는 아픈 곳을 부여잡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근데 중요한 건, 어쨌든 죽을 정도의 온도는 아니라는 거야. 어떤 말도 너를 죽일 수는 없어. 잠깐 덥다가, 잠깐 춥다가, 그러다가 말 거야. 그 온도만 기억하고 있으면 돼."
포키
임인년 십일월 십일일,
일본에 유학을 갔던 박선비가 어느 날 집에 돌아와, 자신의 친구였던 김선비에게 선물로 일본 과자를 주었다. 김선비가 기뻐하며 하나 꺼내 먹은 후 말했다.
"달고 맛있군. 근데 이 이름에 포키(POCKY)는 무슨 뜻인가?"
박선비는 그 뜻을 몰랐으나, 유학도 갔다 왔으니 아는 체를 하고자 태연하게 말했다.
"폭희(暴喜). 받아서 매우(暴) 기쁜(喜) 과자라는 뜻이오."
하고 말했노라. 이 내용은 <승정원일기>에 실제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가을
집 앞 골목길에 단풍이 지고 있었다. 지친 기색으로 출근하던 와중에, 똑같이 지친 기색으로 걸어가고 있는 젊은 여성을 보았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고, 버스정류장 옆의 나무에서 단풍이 흩날렸다.
여성이 잠시 길에 멈춰 섰다. 마치 낙엽 속에 자신을 잠시 맡겨두기라도 하듯, 고개를 살짝 든 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그것을 멀찌감치서 보고 있었다. 흩날리는 낙엽, 버스 정류장, 멈춰 있는 사람 등이 어우러진 그 풍경에서 진한 감정이 느껴졌다.
무식
"사실 한 번 죽으려고 한 적이 있어."
"언니가요?"
"응."
정윤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먼발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는 일탈 같은 거 해본 적 없을 것 같아요, 은하의 질문에 정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옆에 서 있던 은하가 고개를 돌려 정현을 보았다. 은하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정윤의 인자한 얼굴을 떠올렸다. 정윤은 그 미소를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은하가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전혀 상상이 안 되네요. 제 눈에 언니는 성자처럼 보였는 걸요."
"성자."
그 말에 정현은 주말 교회에서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스테인드 글라스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 밑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마치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실제로 공부도 열심히 했다. 자신은 모든 걸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느 날, 모든 게 싫어져서 그녀는 본가에서 차를 끌고 나갔다.
"밤에 차를 몰고 나갔는데. 내가 바다를 좋아하잖아. 해변까지 차를 끌고 들어가서, 마지막으로 밤바다를 보면서 죽기로 했어."
그리고 그녀는 가까운 바다에 도착해서, 잠시 동안 핸들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넘실대는 검은 바다를 응시했다. 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보랏빛 바다는 아니었다. 옆에는 연탄이랑 라이터가 있었다. 그녀는 여느 때보다도 침착한 자신을 발견했다. 모든 감정들이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라이터를 집으려 했다.
"근데, 라이터가 없는 거야."
갑작스러운 결말에 은하는 허무한 듯 되물었다.
"그래서 그만둔 거예요?"
"음, 그치. 열심히 살라는 계시인가 보다, 하고."
정현은 난간에 기댄 채로 먼발치를 바라보았다. 은하는, 다행이네요, 라고 한 마디 곁들이고는 무슨 이야기를 더 해야 할지 몰라 똑같이 정면을 보았다. 정현은 아래로 펼쳐진 수많은 건물들 너머에, 그때 보았던 바다가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사실 그녀가 돌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직장 후배에게 둘러댄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언젠가 밤바다를 마주하고 있을 때, 그녀는 분명 옆에 놓아둔 라이터를 찾지 못해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차 안은 어두컴컴했고, 내부 전등은 고장이 났는지 켜지지도 않았다. 시동은 꺼졌고, 밤바다가 은은하게 흔들리며 모래를 휩쓸어가고 있었다. 그 잔잔한 소음 사이로 틱, 틱, 무언가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백미러로 시선을 향했다. 조수석에 누군가가 타고 있었다.
-누구......?
그녀가 당황한 듯 물었다. 본가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녀가 조수석에 누군가를 태운 적은 없었다. 조수석의 여자는 정현 쪽으로 돌아보지 않은 채 연두색 가스라이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조수석의 여자가 이야기했다.
-라이터 켜는 법은 알아?
-네?
라이터는 본가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정현은 흡연자가 아니었기에 라이터를 소지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이십몇 년을 살면서 라이터를 직접 켜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직접 켜본 불이란 생일 케이크 촛불에 붙인 성냥불, 집에서 쓰던 가스레인지 불 정도였다. 그녀는 본가에서 어떠한 계기로 죽기를 결심한 후, 우체통에 든 작은 가스라이터를 가져왔었다. 시골집 우체통에는 어째선지 항상 라이터가 들어 있었다.
-알긴 알아요.
-어떻게 켜는데?
조수석의 여자가 정현에게 라이터를 건넸다. 정현은 라이터에 연료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냅다 엄지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요령이 없었기 때문에 스파크조차 튀지 않았다. 그녀는 오기를 부렸다. 몇 번인가 어설프게 손가락을 놀린 끝에 결국 라이터는 정현의 엄지에 작은 상처를 내고 손에서 미끄러졌다.
툭, 하고 사이드 브레이크 옆에 떨어진 라이터를 조수석의 여자가 주웠다. 그녀는 차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라이터를 대어보았다. 연두색으로 빛나는 라이터 밑에 연료가 아주 조금 남아 있었다. 이윽고 여자가 라이터를 요령 있게 켰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오렌지색 불빛이 차 안의 어둠을 물리쳤다. 그제야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정현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조수석에 있던 여자 또한 정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아래 놓인 연탄을 한번 흘겨본 후, 말했다.
-참 무식한 친구네.
조수석의 여자는 무척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잠시 동안 정현은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오랜만에 듣는 싫은 소리에 점차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대꾸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끝내 반박하지 못하는 자신은, 어쩌면 진짜 무식한 사람인지도 몰랐다.
이윽고 불빛이 꺼지고, 차 안으로 어둠이 쏟아지는 사이 조수석의 여자는 사라져 버렸다. 연두색 라이터가 덩그러니 시트 위에 놓여 있었다. 연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차 시트에 등을 기댄 채 피곤한 듯 손등을 눈에 갖다 댔다. 아침이 올 때까지,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의미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하고 의문을 던질 때마다, 마치 폭탄을 던지기라도 했듯 주변 사물과 사람들의 의미가 날아가버렸다. 그럴 때마다 옛날 노래를 들었다. 그대와 함께, 하고 시작하는 그런 가사들이 좋았다. 그런 가사들이 마음을 감싸주는 것 같아 좋았다.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했다. 각자 나아가는 방향은 다르고, 그래서 각자의 의미도 천차만별이지만, 누구에게나 위로는 필요했다. 그래서 글을 쓰고 있다. 언젠가 진정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서. 내가 유일하게 의미를 느끼는 지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좀비
모든 좀비들은 저승의 문턱에서 거부당함으로써 생겨난다. (차후 공개)
여보
"근데 왜 전화받을 때 '여보세요'라고 하는 거지?"
"'여기 보세요'의 줄임말이라는데요. 구글에서."
그 후 나는 '여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것이 '여기 보세요'로 생각되기 시작했다. 수화기 너머에 있는 거래처 사람들이 매번 자신을 보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아내는 언제나 자신을 봐달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만 같다. 나는 그날 저녁 들은 여보 소리에, 오랜만에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 오랜만이었다.
버즈
"자꾸 그렇게 나태하게 살면 너에게서 중요한 것들을 앗아가 주마."
어느 날 수호신이 팔짱을 낀 채 그런 얘기를 했다. 내가 대답했다.
"어떤 걸 빼앗아가도 저를 바꿀 순 없을 겁니다."
"그럼 저번 달에 산 무선 이어폰을 갖고 가겠네."
"흥."
"충전케이스만 말이야."
"그건...... 너무 사악한 거 아닙니까?"
물가
매번 가격이 올라가는 밥집 메뉴들은, 꼭 우리가 자고 있는 사이에 저들끼리 담합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야 우리 짬밥이 얼만데 이 정도에 팔려야겠냐?' 갈비탕이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화를 내는 거지. 그러면 옆에 있는 왕만두가 '뼈 있는 말은 주인한테나 가서 좀 해.' 하면서 터진 옆구리를 안 보여주려고 애쓰는 거야.
이렇게 상상하고 있다 보니 갑자기 나는 지금까지 먹어온 음식들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차 싶었다. 진짜 분노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는데, 또 애꿎은 이들에게 감정을 쏟을 뻔했다.
유배
"저도 유배 좀 보내주세요."
"어디로."
"단종처럼, 강원도로요."
팀장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말하였다.
"너 유배당해본 적 없지? 지갑이랑 휴대폰 다 내려놓고 가야 돼. 옷도 그거 한 벌. 단종은 왕이었으니까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도와주기라도 했지. 너 왕이야? 조선시대였어 봐. 우린 천민이야, 천민."
"꼭, 당해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집에서 쫓겨났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