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글자 산문 : 11월 하순

"다음에도 미루면 사람이 아닌 걸로 하자...... 멍멍!"

by 푸른여우

머리말


열흘이나 늦을 줄은 설마 꿈에도 몰랐네요. 그 사이 여기는 눈도 몇 번 내리고, 과제도 폭풍과 같이 몇 번인가 지나갔어요. 발표가 한 주에 다 밀려 있어서, 어느 날은 '못 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할까도 생각했습니다만,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내가 해야 된다'는 다짐을 몇 번이고 한 덕분에 아무쪼록 더 부끄러워지기 전에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답니다. 언제쯤 안 부끄럽게 살 수 있을까 싶습니다만,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는 증거겠죠? 그런 합리화를 해보며, 뒤늦게나마 그간 겪었던 일들을 올려봅니다.

(9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는 상/하편으로 나누었습니다.)




여기


의무적으로 한 번은 질문을 하라고 하시니, 그다지 궁금한 게 안 생겼으나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보고서 3페이지 보시면, 이 인용문을 보시면, 같은 허튼수작으로 이리저리 시간을 끌다가, 마지막에 '질문은 이상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좋았으련만, 무심코 '저는 여기까지입니다'라고 말해버렸다. 순간, 자신의 한계를 자백해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귀가 빨개졌다.





필름


"이건 뭐예요? 스카치테이프처럼 생겼네."

"응. 마이크로필름이라고. 옛날에는 저렇게 책 사진을 찍은 후에, 필름 안에 축소시켜서 보관했어."

그는 능숙하게 기계에 필름을 끼워 넣었다. 잠시 후,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필름이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화면에 확대된 고서들이 열차가 지나가듯 빠르게 페이지 순서대로 넘어갔다.

필름 촬영일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백오십 년 전으로 쓰여 있었다. 세상의 모든 책들을 18mm 필름에 담아낸 사진사의 얼굴이 옆에 찍혀 있었다. 나는 그가 궁금했다. 어떻게 세상을 줄이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하지만 우리가 만날 가능성은 없었다. 여기는 이제 우리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은 과거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다시금 깨달았다.






성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누군가를 싫어할 자격은 없는 거라고 네가 그랬지. 그래서 어떠한 순간에도 너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근데, 자꾸 마음속으로 아니야, 아니야, 하고 되뇌고 있더라. 나는 왜 너를 증오할까.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계속 생각했고, 이제 알았어.

나는 완벽하지 않은 네가, 그걸 핑계로 모든 걸 '모른다'는 식으로 내팽개치는 게 싫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운 좋게 얻은 인연을 능력이라고 착각해서, 나에게 불성실해지는 네가 싫었어."





롸잇


무언가를 쓰는 것이 무척 무서워졌다. 어떻게 쓰든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안 나올 것 같아서. 그래서 맨 정신에 발표를 하러 가면 못 버틸 것 같아서. 밤을 꼬박 새워 뒤늦게 일을 시작해서, 일부러 몽롱한 상태로 나가는 걸지도.

"그런 증상을 고치려면 어떡해야 할까요."

그렇게 묻자, 책상 앞에 앉아있던 조물주가 답했다.

"써, 지금 당장. 만족은 못하더라도, 덜 불만족스럽게. 평생 '나 밤샜어요'하고 동정 팔고 다닐 정도로 치사한 사람은 아니잖아. 그치?




밥심


"그만하려고요."

"안 믿어."

"왜요?"

"밥은 먹었어?"

"아니요."

"그럼 밥이나 먹고 오자."

"네?"

"배고플 때 일 저지르면 후회해."





커피


"나, 요새 아메리카노 먹어."

"무슨 질병 얘기하듯이......"

하긴, 카페를 가면 힝싱 그는 혼자 딸기 라테, 혹은 딸기 스무디, 혹은 딸기 크림 프라푸치노 등 단 것만 찾아 마셨던 것이다. 돈 주고 쓰디쓴 것은 절대로 못 마시겠다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80년대 드라마에 등장하는 귀한 집 자식들처럼, '이렇게 쓴 걸, 어른들은 왜 마시나 몰라.' 하고 얘기하곤 했던 것이다. 벌써 스물여섯이면서.

"괜찮아. 요새는 중학생 때부터 먹는다는데."

마치 잘못을 저지른 딸을 다독이는 엄마처럼, 나는 어깨를 토닥여주며 위로했다. 그게 저렇게 슬퍼할 일인가, 싶다가도, 자기 딴에는 분명 마음 아픈 일일 테니까.





백탕


밤늦게 남편이란 작자가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를 한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늦게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연락을 하겠다는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밥을 안 먹었어, 감히 그가 이야기했다. 나는 주전자에 수돗물을 받은 후, 그것을 정성스레 서너 번 끓였다. 그리고는 국그릇에 담아서 밥이랑 같이 대접했다. 식탁에 앉은 그가 물었다.

"이거 뭐야?"

"백비탕. 조선시대 왕들이 먹던 탕이래. 영혼이 맑아진대."

그는 자신이 왕 대접을 받는 것이 기쁜 모양인지, 늠름하게 숟가락을 들어 투명한 물을 떠먹었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그는 눈치를 보다가 아무 말 없이 밥을 말아먹기 시작했다. 다른 반찬은 없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서 그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미안해, 영혼이 맑아진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인지, 그가 나지막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또 짠해져서, 주전자에 남은 백비탕을 나도 같이 먹었다.





전화


이대로, 그냥 있으면 안 될까요.

새벽 3시가 되었고, 나는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처음으로 부탁이라는 것을 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혼자 방치되어 있었고, 그는 가족들과 한 지붕 아래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좁은 집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지만, 나는 그가 부러웠다.

그래, 그럼. 그가 흔쾌히 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나는 머리맡에 휴대폰을 둔 채 그의 숨소리를 느끼려 했다. 가끔 그가 코를 골았고, 나는 그럴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내일 아침, 어머님의 목소리에 같이 일어날 거야. 그 사실만으로도, 더 이상 아침이 두렵지 않았다.





첫눈 (상)


우리는 계속 북쪽으로 올라갔다. 롱패딩을 입은 우리 둘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거대한 애벌레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눈은 여전히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주위에는 회색 땅밖에 없었다. 민영은 실망한 듯이 한 손에 들고 있던 도구를 딱, 딱, 소리를 내며 휘둘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마지막 지점이야. 그다음은 바다밖에 없어."

지도를 보고 있는 주영에게는 두려움이 가득해 보였다. 여기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면, 다음 겨울을 기약해야만 한다. 다음 겨울에 눈이 올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민영에게는, 아마도 이번 겨울이 마지막이었다. 민영은 눈오리를 만드는 도구를 언니인 주영에게 내밀며 장난을 쳤다. 주영은 해맑은 민영을 보면 가슴이 아팠고, 그때마다 자신이 느끼는 슬픔을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첫눈 (하)


둘은 창백하게 질린 모래사장 위에 있었다. 주영은 넘실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고, 민영은 눈오리를 만드는 도구로 모래를 움켜쥐었다. 모래는 하나로 뭉쳐지지 못하고 금세 흩어져버렸다.

민영은 눈 내리는 세상을 보고 싶어 했다. 그녀가 태어나고 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눈이 내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주영은 민영을 데리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눈은 내리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것은 사납게 휘몰아치는 파도뿐이었다. 시끄러웠다. 너무도 시끄러워서,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자신과 민영이 서 있는 세계가 하얀 눈으로 뒤덮이는 상상을 해나갔다. 그렇게 정적 속에 모든 것을 묻어버리고 싶었다.

그때, 주영은 바다 쪽으로 걸어가는 민영의 모습을 보았다. 뭘 하려는 거지? 주영이 민영의 옆으로 갔다. 민영은 하얀 모래를 주워 바다에 조금씩 뿌리고 있었다. 작디작은 모래알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언니, 이게 눈이지?"

그녀는 그 질문에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바다에서 밀려들어오는 짭조름한 바람을 맞았다. 시끄러운 파도가 금방이라도 동생을 덮칠 것만 같았다. 주영은 그것들로부터 동생을 지키기 위해, 민영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모든 것을 정적에 묻을 수는 없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두 글자 산문 : 11월 중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