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도 벌써 마무리에 접어들었습니다. 저는 인류가 겨울잠을 잤다는 연구 결과를 (직접 읽어보진 않았지만) 굉장히 신뢰하는데,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고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고 싶어요. 그만큼 이번 '두 글자 산문'은 더더욱 힘들게 짜낸 이야기들밖에 없습니다. 푸념하려는 것은 아니고, 본업보다 이걸 더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해지는 그런 어느 날이에요. 부디 읽어주시는 분들께서는 잠을 충분히 주무시고 계시기를 기원합니다.
(10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이번 추천작은 '그냥'입니다.)
말해
"사랑한다고 얘기해주시면 좋았지 않아요? 저, 너무 외로웠는데."
그때, 나는 짝사랑이야말로 제일 무책임한 것임을 알았다.
유언
아빠엄마사랑해요.
새벽까지 술 마시다가 그렇게 문자를 보냈나 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부재중 전화가 몇십 통이나 찍혀 있었다. 죽으려는 줄 아셨단다. 새벽에 남긴 사랑이 의도치 않게 죽음의 빛을 띠었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 주인공들은 죽기 전에 꼭, 사랑했다 누구누구야, 하고 죽던데. 왜 우리는 가장 애틋한 때에만 사랑을 꺼내는지. 돈이든 사랑이든 항상 아껴 쓰라고만 배웠지, 언제 어디에 써야 하는지는 못 배운 탓이다, 분명.
악보
갑자기 텅 비어버린 마음을 끌어안은 채, 드라마나 영화로 빈 공간을 채워보려 했다. 그러나 어떤 감동적인 것을 봐도 빈 곳은 채워지지 않았다.
먹먹한 기분으로 집에 오다가, 어느 유치원 벽에 붙은 아이들의 활동지를 봤다. 거기에는 자기가 생각하는 달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큼지막한 원이 있고, 밑에는 설명을 쓸 수 있도록 다섯 개의 줄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설명 대신거기에 음표를 그려놓았다. 그렇게 줄글은 악보가 되어버렸다. 나는 어떠한 위로의 말보다도, 거기서 느끼는 천진난만함에 마음속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만두
내가 그 집에 들르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났지만, 그는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하루 종일 방 한 구석에 앉아 있다가, 밥때가 되면 젖은 만두를 먹었다. 기다란 젓가락에 냉동 만두를 네 개만 꽂아, 물이 담긴 냄비 위에 걸쳐 끓였다. 시간이 지나면 부드러워진 만두피가 젓가락에 의해 찢어지면서 물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는 물에 빠진 만두를 하나하나 건져 먹었다. 찐만두도 물만두도 아닌 어중간한 만두를.
그가 찐만두를 먹고 싶어서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집에는 찜기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다음에 올 때는 찜기나 사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만두를 젓가락 위에 올리는 거예요. 뚫는 게 아니에요.'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찜기가 찬장 한 구석에 놓인 지금까지도 여전히 젖은 만두만 먹고 있다. 나에게는 그가 매일같이 제사를 치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제사인지는 마지막까지 듣지 못했다.
세탁
날씨가 너무 좋아서 나는 전에 살던 기숙사에 몰래 들어갔다.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적힌 팻말은 신경 쓰지 않고, 택배 기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까지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처럼 뻔뻔하게 행동했다. 이곳을 나간지는 벌써 5년이 되었다.
제일 먼저, 나는 내가 살던 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난간에 팔을 기대고 오랫동안 경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에 있는 무인 세탁실로 향했다. 일렬로 놓인 세탁기들 중 몇 개가 윙, 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한 구석에 공용 다리미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있는 페브리즈를 집어 들었다. 뭐라도 갖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보다. 어느새 자신의 옷을 향해 연달아 분사하고 있었다.
방학
"야 너는 방학 때 뭐 할 거야?"
술자리에서 들은 질문에 나는 텅 빈 초등학교 교실을 상상했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간 후 적막해진 교실을 교탁에서 내려다보는 상상을 했다. 거기서 발표라도 하듯,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만약 방학이란 게 온다면, 먼저 방청소를 하고 싶어. 냉장고에서 상해 가는 음식들을 버리고 싶어. 쌓여 있는 쓰레기는 분리수거하고,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잘 개어서 정리하고 싶어. 쉽사리 빨지 못한 코트는 드라이클리닝 맡기고 싶어. 출근하고 퇴근할 때만 신었던 구두를 수선 맡기고 싶어.
그렇게 좀 살 만한 공간이 되고 나면, 새 화장품을 살 거야. 그리고는 거울 앞에 앉아 '시간에 안 쫓기고' 화장을 할 거야. 드라이클리닝 맡겼던 코트를 입고 아무 거리나 걸어 다닐 거야. 거기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 되고, 너무 많아서도 안 돼.
그러다가분위기 좋은 카페로 들어가 차를 마시고 싶어. 커피는 맨날 마셨으니까 좀 다른 메뉴로. 카페 높이는 2층 이상, 자리는 창문과 마주 보는 개인석이면 좋겠어. 저 사람은 혼자 와 있네, 무언가 사연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면 어쩌지, 하고 그런 상상을 하면 스트레스받으니까. 거울에 어슴푸레 비치는 나만 인식한 채로, 방금까지 걸었던 거리를 내려다보며 당분간 멍하니 있고 싶어. 그리고 집에 올 때 붕어빵을 천 원어치만 사서 돌아올 거야. 두 개는 팥으로, 나머지 하나는 슈크림으로.'
'그런 건 퇴근하고 나서도 할 수 있잖아?' 마치 게으른 사람을 바라보듯 이야기할까 봐, 나는 생각은 생각으로만 남겨두기로 했다. '그냥 좀, 쉬게.' 그 정도로만 대답했다.
아부
"네 아부가 사람을 얼마나 외롭게 만드는지 알아?"
그는 자신이 위로한 사람으로부터 클레임을 들은 후, 오히려 저주를 걸듯, 마음에도 없는 아부의 말을 뱉기 시작했다.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그들이 자기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 있도록 공허한 아부를 했다. 넌 참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이야기하는 속으로는, 세상에 좋은 사람이 어딨어,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주위를 둘러보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타인에게 저주를 걸고 있었다. 아무도 잘못을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걸 보고 그는 앞으로도 계속 이 모양 이 꼴이겠구나, 하고 외로워졌다. 그는 처음에 자신에게 클레임을 던진 사람을 떠올렸다. 비 오는 날 그는 그 사람을 찾아가 매달리며 욕 좀, 욕 좀 해주세요, 하고 빌었다. 상대방이 얼굴에 경멸의 빛 하나 띄우지 않고 이야기했다.
"너 좋은 사람이잖아. 근데 왜?"
참회
"내가 죽어서 꼭 너 참회시킬 거야. 두고 봐."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그냥 걸러 들어도 괜찮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당시 나는 과일안주에 정신이 팔려, 참회를 '참외'로 잘못 알아들은 탓에, 죽은 사람으로부터 참외 박스가 배달 오는 상상을 그날부터 자꾸만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 앞에 영문 모를 참외 박스가 놓여 있었다. 발신인은 불명이었다. 나는 소름이 돋아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죽었어? 덜덜 떨며 이야기했는데, 동기는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동기는 내 상황을 전해 듣더니,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네가 뭔가 잘못한 것 같은데, 사과라도 해 드려.
그 말에 나는 냉장고에 있던 사과를 잘 닦아 참외박스 위에 얹어두었다. 포스트잇에 '사과를 받아주세요'라고 써놓았는데, 상대방이 받아줄지 어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저는 이 일을 할 자격은 없는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자나 깨나 일 생각만 해야 되는 건데,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그러자 선배는 뒤통수를 팍, 때리며 말했다.
"되게 고결하려고 그러네. 야, 우리도 일상이 있는 사람들인데 맨날 그거 생각만 하면 그게 로봇이지. 하다 못해 저기 위에 계시는 선생님들도 '논문 즐겨 읽으시나요?'라고 여쭤보면 '아니!'라고 단호하게 얘기하시는데, 방망이 깎는 노인도 집에 가면 롤티어가 다이아일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러냐? 일단 이 길에 있으면, 그냥 해. 자격 이런 거는 현장에 없는 사람들이 방구석에서 댓글 달 때 쓰는 말이고. 여기, 자기가 자격 있다고 생각해서 일하는 사람 얼마나 되겠어? 다들 그냥 하는 거야. 그냥. 그러니까 그냥, 해."
단맛
그녀는 영의정에게 갈 예정이었던 카스텔라(加須底羅)를 한 조각 훔쳐 집으로 가져왔다. 귀한 음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가장자리만 조금 떼어 입에 넣었다. 겪어보지 못한 단맛과 부드러움이 입안에 사르르 퍼졌고, 지금까지의 고생은 눈 녹듯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하루에 한 조각씩 뜯어먹다 보니 어느새 그녀는 그것을 다 먹어버렸다. 그때부터 어떻게든 비슷한 과자를 만들어보려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이제까지 먹었던 한과나 유과는 더 이상 성에 안 차게 되었다.
그녀는 잠자리에 누워 이제는 먹을 수 없는 과자를 천장에 그려보며, 자신이 천천히 얻어야 했던 횡재를 너무 급히 얻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남편은 사색을 즐기는 선비였다. 그는 그날도 부인의 옆에 누워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