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요 근래 며칠째 눈이 내리고 저는 그때마다 자고 있든지 실내에서 수업을 듣든지 해서 직접 눈이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어요. 하얗게 뒤덮인 세상에서 눈사람, 눈오리, 하다 못해 남의 차에 그리는 하트까지 사람들이 남긴 자취를 보고 있다 보면, 그것은 분명 차가운 눈인데도 따뜻함이 느껴지곤 합니다. '따뜻하게 겨울나세요'라는 말에는 물질적인 난방 외에도, 그렇게 따뜻한 마음을 품자는 뜻도 있는 건 아닐까요. 여러분도 따뜻한 겨울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10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쓴맛
쓴 맛을 좋아하면 사이코패스라는데.
그녀는 눈앞에 놓인 고량주를 보며, 인터넷 어디선가 본 정보로 회식 자리에 계신 어르신들을 모두 사이코패스로 만들어버렸다. 심지어는 옆에 앉아 있던 동기도, 매일 아메리카노를 달고 산다는 이유만으로 사이코패스로 만들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자기도 매일 좋다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다녔으니, 그렇게 따지면 자신 또한 사이코패스다. 술을 안 하는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면, 세상 사람들은 전부 사이코패스인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소주잔보다도 작은 잔에 담긴 고량주를 그대로 들이켜버렸다. 목구멍이 불타는 것 같았다. 위장으로 뜨거운 것이 흘러들어 가, 다시금 혈관을 타고 머리끝 혈관까지 닿았다. 세상이 흔들렸다. 그녀의 주량을 알고 있던 동기가 옆에서 다급하게 외쳤다. 그거 소주 아니야! 하고.
신발
회사를 며칠 쉬기로 했다는 모양이다. 몸에 문제는 없다고 했으나, 내가 옆에서 보기에는 분명히 어딘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이대로 잘리는 게 아니냐며, 어렵게 들어가 놓고 힘들어하는 자신이 너무 나약한 것 같다며 동생은 울상을 지었다. 걸음걸이가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신고 있던 운동화를 내어주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자신의 검은색 힐을 벗었다.
푹신한 운동화로 갈아 신은 그녀는 한층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았다. 나는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적응되지 않는 딱딱하고 위태로운 느낌을 견디며, 이런 걸 신고 매일 일하는 것 자체가 '나약'과는 거리가 먼 일일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박사
동물 연구실 앞을 낯선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내가 누구시냐고 묻자, 그 사람은 자기를 '펭귄 박사'라고 밝혔다. 그는 오랫동안 펭귄에 대해 공부했다면서 전 세계 펭귄의 종류를 그 자리에서 나열했다. 그리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사라져 버렸다. 얼마 뒤 연구실로 돌아온 선배에게, 나는 펭귄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선배가 그랬다.
"그 사람이 자기 보고 박사래?"
"그러던데요."
"어느 박사가 자기를 박사라고 해. 가짜네, 가짜."
하트
차 앞유리에 눈이 쌓였다. 지난밤 누군가가 거기에 하트를 그려놓고 갔다. 그는 차에 탄 다음, 와이퍼를 움직여 눈으로 된 하트를 뭉게 버렸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다음날 일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그는 계속 불쾌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라디오 볼륨을 키워 부정적인 감정을 몰아내 보려 하자, 노래가 금세 차 안을 가득 메웠다.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지워야 하니까.
앞유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이 남긴 사랑의 흔적은 이렇게도 잘 없어지고, 지워지지 않는 것은 자신의 사랑뿐인 듯했다. 그는, 차라리 파렴치해도 좋으니까, 자신이 저지른 사랑도 얼마 안 가 사라지는 것이기를 바랐다. 차에 난 흠집을 문지르며, 혹시라도 지워지지 않을까 기대하듯이.
선물
눈이 내리고 당신이 주문한 홍차 티백이 집으로 왔었다. 박스에 든 티백을 하나 꺼낼 때마다 당신에 대한 생각이 났다. 아마도 당신에 대한 기억도 따뜻한 물에 같이 우려 나오는 모양이라고, 즐겁게 이야기했었다.
몇 해가 지나 다시금 첫눈이 내렸고, 이번에는 당신이 선물한 향수가 도착했다. 당신이 알고 있듯, 그 향은 내가 좋아하는 향이 아니었다. 아마도 당신이 좋아하는 향이겠지. 나는 무언가에 사로잡힌 것 같은 답답한 기분이었고, 그날 그것을 당근 마켓에 팔아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눈을 맞으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차가워지자, 차가워지자, 계속 생각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노래
중학생 때 멜로디만 기억나고 제목이 기억나지 않았던 노래가 있었다. 나는 수많은 노래를 찾아들었으나, 그 노래만은 찾을 수 없었다. 10년이나 지난 지금이 되어서, 어느 날 갑자기 그 노래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왔다. 외국 드라마에서 아주 짧게 나온 노래였다. 나는 그 노래가 K-POP일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기에, 바로 근처에 있는 노래임에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문장
박물관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의 전화기 앞에서 우리는 한참 생각했다. 수화기 옆에 일본어로 쓰여 있는 저 문장이 과연 무슨 뜻일까. 중간에 있는 히라가나는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겠는데, 옆에 처음 보는 한자가 끼어들어 있었다. 누구는 저 문장이 상표 이름이라고 추측했고, 누구는 친일적인 메시지가 쓰여 있는 것이라고 보기까지 했다. 누구는 결국 교수님께 도움을 요청드렸는데, 교수님은 딱 보시고 말씀하셨다.
"매(每) 자네, 저건. 그니까, '매번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毎度ありがとう)'라는 뜻이야."
그때 교수님이 처음으로 마법사처럼 느껴졌다. 생각보다 평범한 내용을 담은 문장이었다.
밤비
정전된 세상에 비가 내렸다. 달이 뜨지 않았기 때문에 비가 내리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비를 맞으며, 은은하게 들려오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빗소리가 마치 공연이 끝난 뒤의 박수 갈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물에 젖은 자신을 보고 박수를 쳐줄 사람은 없으리라.
만약 지금 그 사람이 앞에 나타난다면 어떨까. 아마도 나는 계속 불이 꺼졌으면, 하고 바랄 거야. 가장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가장 강한 모습이었던 때는 도대체 언제였을지.
메일
"나는 메일 끝에 항상 '언제나 감사합니다'라고 붙여."
"미국 사람들이 Sincerely, 하는 것처럼? 뭔 뜻인진 몰라."
"근데 '언제나 감사합니다'라는 거 마음에 없는 소리 같지 않아? 항상 감사할 리가 없잖아."
"그럼 솔직하게, '가끔 감사합니다'라고 하든지."
"그건, 좀 비꼬는 것 같잖아."
"그러면, '자주 감사합니다'는?"
"그것도 좀, 비꼬는 것 같은데."
그리고 그는 메일 창이 띄워진 컴퓨터 앞으로 와서 말했다.
"야. 마지막 문장 신경 쓰지 말고 내용부터 고쳐. '학점 올려주세요'가 뭐냐?"
잔고
통장에 남아 있는 돈이 네 자릿수인 것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란 참으로 묘하다. 앞으로 그가 살 수 있는 것은 1리터짜리 우유와 햇반 몇 개뿐이다. 그간 아무렇지 않게 자동 이체되었던 것들. 버스 요금, 휴대폰 요금 등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회가 솟았다. 그 거리는 그냥 걸어 다닐 걸. 좀 더 싼 음식만 먹을 걸. 싫은 회식이라도 나가서 싫은 소리 듣더라도 얻어먹을 걸. 헌혈하고 받은 쿠폰은 진작에 좀 쓸 걸.
그는 전혀 상관없는 모임에 나가 전혀 모르는 어르신으로부터 택시비 5만원을 받았다. 그날 밤 강남에서 동대문까지 걸어서 오며, 손에 쥐고 있던 지폐를 다시금 꾹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