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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Jan 21. 2023

새해 복 많이 받을래요 외 9편

푸른여우, 하루하나 : 겨울방학 (상)

  머리말


    안녕하세요. 작년에 '두 글자 산문' 쓰셨던 분 같은데요,라고 물으시는 그대, 안타깝지만 기분 탓입니다. 혹은 기분 탓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 처음 오셨다고요,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저희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시시콜콜한 일들을 각종 상상에 버무려 하루에 하나씩 만들고 있어요. 매번 제목을 두 글자로 짓는 거에 대한 반항심이 들어, 올해부터는 하루에 하나씩 쓴다는 뜻에서 '하루하나'라는 이름으로 바꿨어요.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직접 경험한 건지, 누군가한테 들은 이야기인지, 상상해 보는 것도 재밌는 일일 거예요.

   근데 그거 아세요? 일본어로 하루는 봄(春)이고, 하나는 꽃(花)이라는 뜻이래요.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렇지 않던 하루하루의 일상이 뭔가 훈훈한 향기를 풍기는 것 같기도 하더라고요. 어쨌든,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10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을래요


    "오래 사는 게, 행복한 건가?"

    새해에 던지신 질문이었다. 나는 할머니와 쎄쎄쎄 하던 손을 멈추고 그 질문에 답해보려 했다. 그간 인문학을 공부한 이유가 이런 질문에 능숙하게 답하기 위해서 아니었던가. 그러나 새해 첫 대답은 이랬다.

    "저 결혼하는 건 보셔야죠."

    비혼주의자인 나는 끝내 거짓말로 위로를 드렸다. 그렇게 문학 공부를 한 결과가 거짓말이라니.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에 무안해져서, 다시금 잡은 손만 쎄쎄쎄, 하고.







  설날클로스


   "미국에는 산타클로스가 있잖아."

   "그치."

   "우리나라도 설날클로스가 있었어."

   굉장히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뭐 하는 사람인데."

   "새해 정각에 신년인사 문자를 보내는 거야. 근데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지."

   "왜 사라졌는데."

   "문자를 보내고 나니까 누군가 얘기를 하는 거야. '어차피 단체문자잖아. 난 만인을 향한 사랑은 싫어. 이 박애주의자 같은 놈아.'"  

   "이상한 사람이네."

   "그리고 또 누군가 얘기를 하는 거지. '너 왜 나한테는 문자 안 줬어? 내가 뭐 잘못했니?'"

   "그런 사람도 있구나."

   "그래서 설날클로스는 언제부턴가 사라져 버렸어."

   "그래서 새해 문자를 안 보냈구나."

   나는 그에게 '내가 뭐 잘못했니?'라고 할 참이었는데, 미리 얘기를 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그는 저번 크리스마스 때는 나에게 한 마디만 보냈다. 메리여,라고. 그는 충청도 사람이었다.








  입신양명


   저승사자로 임관된 후 나는 줄곧 고위층 분들과의 술자리를 함께해야만 했다. 나는 살아생전에도 이런 회식을 자주 가졌기에, 술 마시는 것 자체는 그다지 큰 고충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대비마마라는 자가 이런 말을 하면서 발생한다.

   "지금 이 연회가 무척 즐거우니, 어찌 돌아가면서 시를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시작이다. 저 사람들은 생전 일반 평민인 나를 가지고 놀려고 저들끼리 또 시를 지으려는 모양이다. 뜻도 모르겠는 시가 한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여느 때처럼 입을 꾸물거렸다. 태후가 고개를 저었다. 

   "내 아주 실망이오. 차사는 그간의 술자리에서 배운 것이 없는가? 그래가지고 어찌 입신양명할 수 있냐는 말인가."

   "죽어서 이미 과분한 직책에 있사오니, 어찌 더 출세를 하여 이름을 떨치겠사옵니까?"

   "어허. 입신(立身)이라는 건 몸을 세운다는 뜻이요, 올바른 인간이 된다는 뜻이오니, 어찌 출세만 의미할 것인가."

   나는 취기가 돌아 그런 얘기를 해버렸다.

   "그런 의미라면, 마마께서야 말로 입신하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그날, 나는 저승사자 자리에서 잘렸다.







  아직 돌아가는 중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느 비구니로부터 꽃으로 된 화관을 받았다. 무슨 꽃입니까, 나는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외국어가 서툴렀고, 결국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내가 우물쭈물하며 있자, 비구니는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 말을 했다. 나는 그 발음을 기억하여, 돌아오는 공항에서 그것을 검색해 보았다.

   -올해도 무식하기를.   

   나는 처음에 나더러 바보라고 이야기한 것인가 생각했다.

   비행기에 탄 후 그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친구는 그 문장이 사원에 있는 이들끼리 새해에 서로 주고받는 문장이라 했다. 올해도 자신이 얼마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지, 또 자신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발견하고, 또 깨달아나가자는 뜻에서. 인생은 무식의 연속이므로 알아나가는 기쁨은 평생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비행기가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다.









  미래에서 살려드리려 왔어요


   "여기서 먹고 싶은 거 다 꺼내 가세요. 10분 밖에 없지만."

   미래에서 왔다는 저 자는, 과거에 굶어 죽은 이들에게 온정을 베풀겠다면서 갑작스레 나타났다. 그들은 거대한 냉장고 앞에 섰다. 금방이라도 손이 얼어버릴 것 같은 네모난 상자 속을 헤집어가며, 먹을 수 있는 것을 살폈다.

   냉장고에서 쏟아져 나온 과일들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과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표면이 매우 검었기 때문에 타고 남은 숯 같은 것으로만 생각했다.

    미래에서 온 자가 그것을 보면서 '과거 사람들은 우매하다'라고 말했고, 그것을 옆에서 보던 서기관은 몰래, 자신의 옆에 있는 상관이 '시간을 뛰어넘는 무개념'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다.







  수필러브


   그는 고대가요를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최근 고대가요 연구자들은 약 오백 년 전 아이돌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소위 엠카운트다운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모양이나, 그는 특이하게도 자료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그 이전의 가요톱텐기에 관심을 가졌다.

   얼마 전까지는 혼성 그룹 '쿨(COOL)'의 노래가 지닌 신나는 리듬과 막장스러운 가사 사이의 절충에 관심을 갖더니(실제로 그는 그거로 석사논문을 썼다), 이제는 '주주클럽'이라는 그룹을 연구한다고 이야기했다.

   "2집 타이틀곡이 '수필러브'라는 곡이었어. 이 곡은 대표 가사는 '수필 같은 사람이 안 생길까'야."

   나는 되게 독특한 가사라고 생각했다.

   "근데, 판본에 따라서 어디는 수필 같은 '사랑'이라고 하고, 어디는 사랑이랑 사람을 혼합해서 써."

   "'사랑' 쪽이 맞지 않을까요? 제목이랑 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처음에 그는 '수필러브'라는 제목도 '수퍼 러브(Super Love)'의 오타라고 생각했다는 모양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시대 사람들이 이야기한 수필 같은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려 했다. 그때의 사랑은 지금의 사랑과는 얼마나 다르며, 앞으로의 사랑은 또 지금의 사랑과 얼마나 달라질까. 확인은 못하니 추정만 해볼 뿐.







  배우자 전화번호


"아빠가 엄마 번호를 '갓'이라고 저장했더라구."

"갓?"

이거? 엄지를 추켜올리면서 민준은 하윤에게 물었다.

"아니. 아빠가 그러는데, '갓'이 아내의 옛날 말이래."

"그렇구나."

"실은 엄마가 저장해 둔 이름인데, 절대 못 바꾸게 한다는데."

"신이 되고 싶으셨나 보다."

"너희 부모님은 서로 뭐라 저장하셨는지 알아?"

"응. 아빠는 엄마 번호를 '밥맛이야!'라고 저장하셨어. 느낌표 살려서."

"엄마는?"

"엄마는, 아예 저장을 안 해놓으셨던데."







  겨울잠


   "인류가 옛날에 겨울잠을 잤다는 연구결과가 있는데, 난 매우 동의해. 그래서 1월이 시작되고는 계속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어. 밥을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났어. 사람이 쉴 때는, '이 이상 쉬면 큰일 날 것 같은데' 싶을 때까지 쉬어야 된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래야 자고 일어났을 때 찝찝한 게 없더라구. 근데, 다시 일하려면 시간이 걸리긴 하더라."






  냉장고 속 괴물


   -오늘 너네 집 놀러 갈 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듯한 집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해치울 것이 한두 개가 아닌 듯했다. 설거지나 빨래 정도면 괜찮다. 방을 치우는 것도 그냥 물건들만 제자리에 놓으면 된다.

    제일 문제는 냉장고였다. 저 깊은 곳에서, 한때 야채였으나 지금은 괴물이 된 생명체들이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 나는 맞서 싸우기로 했다. 안에 처박힌 봉지를 들어, 싱크대에 곰팡이 핀 파, 고추 같은 것을 뒤엎고 물기를 쭉 짜나갔다. 내가 미안해, 내가 미안해, 계속 되뇔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 면회


   하은은 유리벽 너머에 있는 사람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자신을 보러 오는 사람도 가뜩이나 얼마 없는 와중, 눈앞에 있는 낯선 이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옆에 서 있는 간수에게 귓속말로 이야기했다.

   "누구예요? 저 사람."

   "신청서를 보니까, 일 년 전의 이하은이라고 적혀있던데."

   그 말에 하은은 고개를 푹 숙인 그에게 눈길을 돌렸다. 설마, 하는 마음이 잠시 든 게 조금 바보 같았다. 다시금 귓속말을 했다.

   "정신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냥 돌려보내지. 시간 얼마나 남았어요?" 

   "3분 정도. 간단하게 끝내."

   하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보았다. 그다음 가볍게 유리벽을 콩, 콩 두드리고 반응을 살폈다. 신청서 탓인지는 몰라도, 그는 이상하게 자신과 닮아 보였다.

    무슨 일이세요, 하은이 물었다. 그러자 건너편에 있던 '일 년 전의 이하은' 씨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가는 길이 정말 행복할까요?"

    그 질문은 분명히 자신이 몇 해 동안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었다. 자신은 몇 번이고 그 질문을 미래의 나에게 묻고 싶었고, 또 과거의 자신에게 답해주고 싶었다.

    앞으로 몇 년 뒤에는 또, 또 그보다 몇 년 뒤에는 또 다시금 많은 생각들을 다르게 하고 있으리라. 지금의 본인이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였다. 하은은 말했다.

   "그런 걸 계속 따지다 보면, 지금 가는 길이 가장 불행한 길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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