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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Sep 04. 2023

스물다섯 살 생일

푸른여우, 하루하나 / 9월 4일

    스물다섯 살이 되는 생일에 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저승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나는, 어쩔 줄 몰라  쭈그려 앉아서 대충 모래 바닥에 글자를 쓰고 있었다. 의미 없는 이름 석자를 쓰고 있을 즈음, 흰 와이셔츠를 입은 직원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거기에는 생전 본 적 없는 손목시계가 있었고, 시계에 찍힌 숫자를 보고 그가 말했다.

    "당신에게 처음 드린 시간은 총 삼만 일 정도였습니다. 그중 일만 일이 조금 안 되게 시간을 썼군요."

    "그럼 남은 이만 일은 환불되나요? 아니면 이월이라도."

    "그건 안 되죠. 원칙적으로 요금의 환불은 불가능하답니다."

    "꼭 자유이용권 얘기하시는 것 같네요."

    "정확히 이해하고 계세요."

    그는 나를 직원실로 이끌었다. 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나는 옆에 놓인 간이 의자에 앉았다.

    "많은 분들이 여기 오시면, 자기 삶은 의미가 있었냐고 물어보곤 하시죠."

    "제 삶은 의미 있는 삶이었나요?"

    "음, 의미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무의미하다고 보는 입장이에요."

    "왜죠?"

    "왜냐하면, 사람은 태어날 때 그냥 태어나거든요. 저승 사람들끼리 생전의 업적을 스펙 삼아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 때 '저는 태어나서 이런이런 것을 하고 싶습니다' 하고 어필하고 그러지는 않아요. 사람은 그냥 태어나고, 그냥 죽어요. 그 찰나에 어떻게 시간을 때우느냐의 차이일 뿐, 과정으로만 보면 '의미'라는 건 생각보다 무의미한 말이에요."

    "그런데도 왜 사람들을 태어나게 하는 거예요?"

    "어, 그 질문은 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사람이 이승에 태어나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니까, '왜'라고 물어도 답할 수 있는 건 없어요. 당신의 수많은 조상님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건 그냥 '자연의 이치'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가 아니라 '태어나고 무엇을 할지'를 생각하는 게 나아요."

    "그렇게 이야기하셔도, 저는 이미 죽었어요."

    "그래도 당신은 오래 계신 편이에요. '시간을 때운다'는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삶이 끝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답니다."

    "남의 불행을 가지고 행복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통계가 그렇다는 거죠. 일만 일 기념을 못 하신 건 개인적으로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일만 일이 뭔데요? 설마 태어나서 일만 일 된 거요? 그걸 누가 챙겨요."

    "챙길 만하죠. 살면서 딱 한 번 오는 기록적인 날인데. 일만 일에는 어엿한 성인이 된 자신을 축하해 주고, 이만 일에는 대부분의 할 일을 마친 자신을 축하해 주고, 삼만 일에는 이제까지 버틴 자신을 축하해줘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보아하니 이 직원은 숫자를 굉장히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저한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그러자 그는 산뜻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여기서의 시간은 마음껏 쓰셔도 됩니다. 여긴 '낭비'라는 개념이 없거든요."

    나는 벽에 기대어 자기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그렇게 가능한 한 시간을 들여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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