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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Oct 02. 2023

추석 복 많이 받으세요 외 12편

푸른여우, 하루하나 : 추석특집

  머리말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은 있는데, 왜 추석에는 복을 받으라고들 안 할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 농사가 주업이었던 조상님들의 입장에서는, 추석부터 설까지의 기간은 농사를 짓는 기간이 아니다 보니, 복을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던 걸까요. 그렇다면 겨울에도 일을 해야 하는 우리들은 추석이든 언제든 복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추운 시기를 함께 나실 여러분들을 위해 '추석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다소 어색한 기원과 함께 어렵게 빚은 글들을 선물로 드리려 합니다. 헬프 유어셀프.

    (13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와 많다!)



 

 추석 복 많이 받으세요


   열 살 때 엄마는, '이제 우리 딸은 추석이 아흔 번 남았네.' 하고 평소 뭐든지 숫자로 환산하시던 버릇대로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 '아흔 번이면 그래도 많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할머니댁은 왠지 모르게 먼지가 많고 낯설어, 언제쯤 집에 가나 시계만 보고 그랬다.

    그리고 오 년 뒤에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이번 생의 나에게 추석에 할머니와 시간을 보낼 기회는 총 열네  주어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회라는  무척 적은 것으로 느껴졌다.

    다시 십삼 년이 지나고, 그때 나에게 남은 추석은 어림잡아 일흔세 번 정도였다. 재작년부터 본가에는 돌아가지 못했다. 귀찮고, 힘들고, 부모님 뵙기가 죄송스러웠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 추석 전날이 되었다. 인의 부모님이 갑작스레 돌아가셔 나는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석 앞두고 무슨 일이냐는 누군가의 위에, 문득 그 사람에게는 작년 추석이 가족 함께 보내는 마지막 추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나에게 남은 추석은 몇 번일까. 일흔두 번일 수도 있고, 한 번일 수도 있었다. 사람은 매년 마지막지 모르는 추석을 보고 있었다.

    나는 뒤늦게 기차표를 예매해보려 했다. 그러나  '매진'이라는 글자만이 붉은색을 띠며, 나에게 무언 경고를 하는 것만 같았다.



 

  재회


    먼 훗날, 당신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라는 물음에 나는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는 수첩 맨 밑에 볼펜으로 작게 끄적였다.

   -최선을 다해 당신의 부재를 견디고 있었습니다.

 



  나이-레벨


   "나는 처음에 나이를 먹는 것은 게임에서 레벨 업하는 거랑 같다고 생각했어. 근데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은 게, 먹은 나이만큼 사람이 강해지는 건 아니라는 거. 나는 여전히, 마치 튜토리얼 없는 게임을 매번 처음 시작하는 것처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분이야."

   "아니야. 처음에 네가 한 비유는 정확해. 근데 게임에서 가만히 있는다고 레벨이 올라가는 건 아니잖아? 레벨을 올리려면, 때로는 적이랑 싸우고, 때로는 NPC들을 도와줘서 경험치를 쌓아야 한다구. 좀 더 많이 경험하고, 강해져 봐."






  반길


   "원래 그럴 운명이었어요.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보려고 해도 결국 잘 사는 애들만 못하고, 죽을 때까지 저만치 밑바닥에서 남들한테 굽신거리면서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구요. 근데 뭐, 나보고 뭐, 뭐 어쩌라구요."

   "운명. 그래. 사람은 자기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때 운명이라는 단어를 꺼내. 자기는 원래부터 이랬다고, 이럴 운명이었다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렇게 얘기하면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거든. 사람들 다 그래, 난 너 이해해. 근데 있잖아. 다른 사람들이 다 그랬다고 해서, 너도 그래야 된다는 건 아니야."

   그녀는 무기를 든 료의 손에 자신이 방금 뽑은 운세 종이를 쥐어주며 말했다.

   "내가 너에게 반길(半吉)을 줄게. 대길이 아니니까 운명에 기대하지 말고, 대흉이 아니니까 운명에 실망하지도 마. 그냥 앞만 보고 걸어. 한참 걷다가 그때도 네 운명이 엿같으면, 그때 너 혼자 죽든지 말든지."





  광장


   숨이 막힐 것 같아서 본능적으로 넓은 곳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장소를 찾아다녔다. 거대한 광장이 나왔고, 비가 부슬부슬 오던 탓인지 사람들은 대부분 실내로 몸을 숨기고 여기에 나만 혼자 남아 있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광장 중앙에 섰다. 나무 사이에 놓인 스피커에서 라디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역 대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라디오였다.

   -오늘 하루 수고하신 여러분들을 위해, 잠시 동안만이라도 쉬는 시간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적어도, 내가 힘들지 않았던 때에는 그 말을 주의 깊게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어느새 그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서히 눈을 감아봅시다. 그 말에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우산을 걷고, 대리석 위로 쏟아지는 얇은 빗소리가 세상을 조용히 채워갈 때까지 기다렸다. 오늘 하루,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말에 나는 조용히 눈을 떴다. 구름 사이로 삐져나온 햇빛이 커튼을 만들고 있었다.




  추리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들을, 누군가가 너 듣기 좋으라고 내뱉은 헛된 말로 생각할지, 아니면 누군가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칭찬으로 생각할지는 너의 맘이야. 하지만 프로파일러 자격증 같은 걸 갖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인지 함부로 추리하지 말기를 바라. 함부로 유추하고, 함부로 상처받고. 인간들이 스스로 불행해지는 이유 중 하나야. 직접 이야기해 볼 용기가 안 나서, 일단 상상력부터 펼치는 거."





  마라탕


    "마라탕 집에 같이 가서 '꿔바로우 먹을래?'라고 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어."

    "그 말은 지금도 할 수 있잖아요."

    "그치. 단지 '내가 살게'라고 못 할 뿐이지."




  큐앤에이


   "나에게 들러붙은 어둠의 정체가 무엇일지 항상 생각해."

   "결론은 났어?"

   "아니. 오래 생각해 봤는데 잘 모르겠어."

   "어쩌면 처음에 생각한 게 답일 수도 있지."




  길


    "나는 지금까지 올바른 을 계속 알려줬는데. 너 매번 의심잖아. 진짜 이 길이 맞냐고. 그래서 아직도 여기 있는 거 아니야?"

    "그냥 길이나 알려주고 가세요. 더 듣기 싫어요."

    그러자 신이 인자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좋아. 저기 세 번째 난 길이 네 길이야. 그리고 하나 더 알려줄게. 넌 2km 정도 더 걸어간 다음에 네 입으로 또 이렇게 얘기할 거야. '아까 그 갈림길에서 다른 길로 갈 걸 그랬어'라고."





  어른 아이


   "뭐든 해낼 수 있다고 꿈을 꾸면 어린이인 거고, 뭐든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 어른이 된다고 했어.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이제 어른인거지."

   "자기 보고 어른이라 하는 사람은 어린이일 확률이 높댔어요."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로."





  산


    비에 젖은 채로 문득 위를 올려다보니, 초록빛이 도는 산등성이로 하얀 물안개가 살아 숨 쉬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안개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생물처럼 느껴졌다. 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힘들고 지쳤을 때, 흰 안개는 골목길 구석구석까지 몸을 뻗어나갈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안개가 부드럽게 사람들을 끌어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것만으로도 어째선지 위로가 되었다.




  오십만 원


   어느 날,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 모은 50만 원을 부모님께 드렸다. 손 벌리지 않으려고 빠듯하게 살던 나날들에, 그래도 한두 푼씩 엮어 만들어낸 값진 돈이었다. 한 번이라도 좋았다. 그녀는 자신의 잘 나가는 친구들처럼 부모님께 용돈이라는 것을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몰래 아빠 통장으로 50만 원을 보냈다.

   한편 그녀의 부친은 통장에 적지 않은 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제일 먼저 딸의 안전을 걱정했다. 그래서 바로, 잘 걸지도 않던 전화를 걸었다.

   -안 자고 뭐 해.

   "그냥요. 뭐 좀 하느냐고."

   -50만 원은 무슨 돈이야.

   "용돈이요. 엄마랑 맛있는 거 사 드세요."

   그 말에 그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몰랐으나, 수화기 너머에서 부친은 딸의 안전을 확인하고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얼마 뒤, 부친이 말을 이어갔다.

   "너 쓰지."

   "그동안 못 드린 거 드리는 거예요. 그냥 쓰세요."

   "어디에 쓰는데."

   "음, 평소 쓰고 싶으셨던 곳에요."

   그러자 또다시 그는 말이 없었다. 그는 딸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아이는 슈퍼에 같이 가서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이야기하면, 꼭 사고 싶은 게 없다고 사양하곤 했다. 그런 모습을 누군가는 기특하다고 이야기할지도 몰랐지만, 그는 씁쓸했다. 이 아이는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을까.

   적어도 자신은, 자신이 어릴 적에 느꼈던 감정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얘기할 수 없었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에 열심히 벌었다.

   그러나 딸은, 한 번도 무언가를 먹고 싶다고, 무언가를 갖고 싶다고 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어린 딸이 했던 그런 사양들이 그를 다소 무안하게 했었다. 그러면서도 딸의 마음이 선의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말을 아끼고 있었다. 그래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아빠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딱히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 하지만 너는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냐. 그리고 너는 그걸 할 수 있는 나이니까...... 애쓰지 마라. 세상 모든 부모가 그런 건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아빠 입장에서는, 우리 딸이 그 돈으로, 우리 딸 원하는 걸 했으면 좋겠다."




  머리 깎기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머리를 싹 밀어버리고 산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저녁에 휘청거리다가 아무 미용실이나 들어갔다. 7년을 이곳에서 살았지만, 이 주변에는 머리를 잘 깎는 미용실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 없는 미용사라도 바리캉으로 미는 건 잘하겠지. 나는 하루빨리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남는 자리에 앉자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어떻게 해드릴까."

    "빡빡 밀어주세요."

    순간 가위를 들고 준비하시던 아주머니의 손이 멈췄다. 잘못 들었나, 하고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하셨다.

    "진짜로?"

    "네, 진짜로요."

    나는 각오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주머니는 가위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고민하셨다. 그때, 옆자리에 있던 학생이 '저 끝났는데요' 하고 아주머니를 불렀다. 아주머니는 잠시 시간을 벌듯, '잠깐만 기다려요. 저쪽 마무리 좀 하고.'라고 하시고 그 학생에게 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푸석푸석한 생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하루 겪었던 수많은 감정들, 수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스쳤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나를 꽤 오랫동안 보았다. 그 눈을 마주하고 있으려니까, 왠지 모르게 삭발을 하려는 자기 자신이 불쌍해졌다. 마음 약해지지 말자, 오늘에야말로 결판을 내자, 그런 생각을 하며 은연중에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다 됐지?"

   "와, 진짜 잘 됐는데요."

   옆자리 학생의 감탄이 유독 크게 들려 나는 옆을 보았다. 그러자 이 주변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완벽한 웨이브가 눈에 들어왔다. 이 주변 미용실은 다 엉망이었는데? 놀란 와중에 학생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도 만족에 찬 얼굴로 이곳을 나가고 싶어졌다. 아주머니가 이쪽으로 오셨다. 아주머니는 조심스럽게 카트에 담긴 바리캉을 손에 쥐셨다.

   "잠깐만요. 잠깐만."

   나는 으르렁대는 바리캉을 거울로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저 펌 할래요. 펌. 아까 나가신 분처럼, 무, 뭐 애즈펌? 잘 모르겠는데 그런 펌이요! 안 깎을래요. 나 삭발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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