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열심히 준비한 논문이 떨어졌어요. (열심히......?)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모아 놓은 글들을 올리는 이유는, 나중에 괜찮아졌을 때 이 글을 보면서, '아 이 때는 이런 감정이었지.'라고 생각하고, 한 발 더 나아가 '지금 돌이켜보니 되게 사소한 일이었네.'라고 웃어넘기고 싶다는 생각에. 날씨는 추워지고 한 해는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은 좀 따뜻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아직 살아 있어요.
(11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책잇아웃
중학생 때 빠졌던 어떤 만화가 있었다. 그 만화는 12권으로 완결되었고, 나는 '이야기의 끝'을 보는 게 겁이 나서 11권과 12권을 창고 속에 넣어놨다. 그 후에 결말을 한 번도 안 찾아본 걸 보면, 그만큼 결말이 중요한 만화는 아니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른이 되어 옛날 집에 들렀을 때, 문득 창고의 문을 열어 그 책을 다시 읽었다. 그때 후회했다. 중학생 때의 내가 겁먹지 않고 이 책의 결말을 봤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그 감동과 여운을 곱씹을 수 있었을 텐데. 스쳐 지나간 인연을 후회하듯, 기묘한 그리움이 나를 흔들고 갔다.
잠수부
친구가 어느 순간 잠수를 탔다.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고, 연락도 받지 않았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노릴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고 완벽한 잠수였다. 나는 며칠 전에 전달받은 그의 이메일과 패스워드를 메모장 한편에 기록해두고 있던 참이었고, 어느 날 밤, 걱정과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의 구글드라이브를 몰래 들어가 보았다. 27, 이라는 제목의 녹음 파일 하나가 가장 최근의 것으로 떴다. 내가 그것을 조금 망설인 후 누르자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저는 옛날에 그런 게 싫었어요. 그, 겉을 번지르르하게 쓰려고 하는 블로그 글들. 특히 '당신은'으로 시작해서 '사랑'이 목적어로 나오는 글들을 보면 더더욱. 꼭 처음 연애하는 중학생의 카카오스토리를 보는 느낌이잖아요. 근데 어느 순간 제가 쓴 것들을 돌려보니까 저도 다를 바 없더라고요. 과거의 나는 나름의 철학과 논리를 거기에 집어넣었겠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오글거렸겠어요? 그래서 저는 어느 날 제가 쓴 글들을 다 지우고 말았어요. 누가 딱히 보는 것도 아닌데, 제가 싫어서. 한동안 일기도 쓰지 못했어요.
지금 와서 생각이 든 건데, 저는 제가 싫어했던 것들을 '왜' 싫어했는지 좀 더 잘 고민해봤어야 했어요.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고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게 버릇이 들다 보니, 어느 순간 저 자신도 이유 없이 싫어하고 있더라구요. 아, '이유가 없다'는 말도 실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을 텐데, 누군가(혹은 무언가)를 싫어하는 데에 이유가 없을 수가 있나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단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니까, 혹은 알기를 거부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이유 없어!'라고 하기 시작한 거겠죠. 그래서 저는 제가 '이유 없어!'라고 말하기 시작한 과거의 '어느 순간'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어요. 그러면 적어도 명확한 이유를 가지고 무언가를 싫어할 수 있겠죠. 운이 좋으면 싫어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르죠.
그래서 하루씩 거슬러 올라가 볼 생각이에요. 어느 시점부터 제가 잘못되었는지, 하루하루 거슬러 올라가는 일기를 써보기로 했어요. 다행히도 요즘은 세상 곳곳에서 저의 행적을 기록해주고 있어요. 주고받은 카톡이랑 문자 내역, 인스타 스토리, 카드 결제 내역, 유튜브 시청 기록 등등. (와 이렇게 써보니 함부로 자살은 못 하겠네요. 제가 죽으면 제 부끄러운 사생활을 누군가는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거잖아요.) 어쨌든, 그것들을 하나하나 모아다가 상호 연관관계를 찾으며 과거의 저를 유추해 나갈 계획이에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으니까, 저를 찾지는 말아 주세요.
저는 지금부터 과거로 떠날 거예요. 과학적인 의미에서의 시간 여행은 불가능한 거지만, 문학적인, 죄송해요. 제가 어휘력이 부족해서요. 문학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 단어를 쓸게요. 문학적인 의미에서 사람은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이 가능해요. 다만 과거를 수정할 수 없고, 그만큼 현재의 시간을 대가로 지불해야 되지만, 고치지 못하는 과거라도, 한 번쯤은 제대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는 '제대로'라는 단어예요. 제대로. 제대로 돌아가야 해요. 어쭙잖은 시간여행은 도리어 부작용을 낳아요.
괜찮아요. 곧 돌아올 거예요. 저희 교수님이 그러셨거든요. 오래 고민하는 것보다는 깊게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리고 저는 다행히도, 시간을 많이 끄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에요......"
나는 그 녹음파일을 끄고 일기를 쓰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는 지금쯤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갔을까. '이유 없음'이라는 핑계를 대기 시작한 '어느 순간'을 찾아냈긴 했을까. 현재를 사는 나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과거로 떠나는 시간 여행에 이미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대가로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한 달. 평균적으로 한 달이라는 시간은 과연 짧은 시간일까, 긴 시간일까.
추석 제사상 (영신迎神)
"제사? 그게 뭔데."
"옛날 풍습인데, 맛있는 걸 차려놓고 죽은 사람을 부르는 주술 같은 건가 봐. 인터넷에서 봤어."
"저주 같은 거야?"
"글쎄.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전에는 설날과 더불어 가을 중에 '추석'이라는 명절이 있어서 한 사나흘 정도를 쉬었다고 한다. 나는 빨간 날이 하루도 없는 올해 9월의 달력을 보면서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이구나, 하고 한탄을 하던 참이었다. 그래도 기록에 보면 옛날 사람들은 이 날 한 자리에 모여 다 같이 치고받고 싸우는 게 일상이었다고 하니, 어쩌면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을지 모른다.
나는 불러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마침 추석을 맞은 김에, 그날 밤 나는 그녀가 준 자료들을 살펴보면서 제사상이라는 것을 재현해보려 했다. 자료에 남은 사진을 보면서 어찌어찌 비슷한 그릇을 구해 음식을 담아나갔다. 황태포, 한과......? 내가 불러내고 싶은 분이 살던 시대와는 별로 맞지 않을 듯한 음식들이었다.
그래서 자료에 나온 순서를 지켜가며, 대신 그분이 좋아할 만한 음식들로 상을 재구성해 나가기로 했다. 규칙은 최대한 따라야 주술이 성공할 것 같았다. 홍동백서. 동쪽에는 붉은색, 서쪽에는 하얀색. 새빨간 마라샹궈가 동쪽에, 크림소스를 뿌린 꿔바로우가 서쪽에 올랐다. 반서갱동. 밥은 서쪽에 국이 동쪽이면...... 국을 어떤 걸로 드릴까 하다가 뼈해장국으로 끓였다. 술이랑 같이 드시기엔 이게 낫겠지.
제도와 자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다 보니 결과적으로 만들어진 제사상은 상당히 지저분한 인상이었다. 나는 그래도 얼추 느낌은 나는 것 같다고 스스로 합리화를 했다. 이승으로 부르고 싶은 옛 분의 이름 석 자를 태블릿에 써서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옛날에 쓰던 초를 두고 불을 밝혔다. 분향강신. 향을 밝히고 영혼을 맞이한다는 뜻이랬다. 나는 라이터로 촛불을 밝히며, 속으로 '분향강신!'이라고 몰래 주문을 외웠다.
촛불을 밝히면 저승에 계시던 분들이 그 불빛을 따라 들어와 차려진 음식을 드시겠지. 나는 혹시 몰라 현관문에 체인을 걸어둔 채 살짝 열어두었다. 저 문틈으로 아무 말 없이 들어온 옛날 사람들이 상 앞에 앉아 숟가락을 드는 상상을 했다. 위치 상으로 나와 눈이 마주칠 것이 분명했다. 나는 괜히 부담스러워져 상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잠시 뒤, 벽에 비치는 어슴푸레한 촛불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혹여나 오셨을지 모르는 그분을 향해 조심스레 여쭸다.
"오셨습니까."
추석 제사상 (유식侑食)
미친 제사상이다.
문틈으로 겨우 들어온 그가 상을 보고 처음 한 생각이었다. 자신이 아직 이승에 있었던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도 전에는 그래도 제사 풍습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간혹 커뮤니티에서 제사상에 피자가 올라왔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돌았어도, 적어도 그의 일가에서 제사상에 올라오는 음식들은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나이가 들고, 세대가 바뀌면서, 제사는 미신으로 여겨져 사라졌지만(그 증거로 그는 죽은 다음 자식들로부터 2년 정도만 제사상을 받았다. 생전에 힘들면 하지 말라고 당부는 했는데, 그래도 그는 4년은 해줄 줄 알았다), 풍습 자체가 없어졌다면 없어졌지 이렇게 조상님을 놀라게 할 목적이 다분한 서프라이즈 제사상은 처음이었다.
태블릿에 삐뚤빼뚤 쓰인 한자 세 개는 분명 자신이 살아생전에 가졌던 이름이었다. 그것은 다소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분명 자신의 자리를 표시해주고 있었다. 그는 사학과였다. 그는 자리에 앉아 다시금 역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물론 상 위에 있는 음식들은 자신이 생전 즐겨 먹던 음식들이었다. 마라샹궈랑 꿔바로우라니, 되게 그리운 음식들이었다. 아 그래도 좀...... 나름 전통을 보존하는 데에 사명을 다해왔던 그의 입장에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게 맞나......? 죽은 지 몇 백 년이 됐는데 그는 직업병처럼 다시금 전통의 계승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이, 내 정신 좀 봐. 죽어서도 이걸 고민하네...... 일단 밥 먹고 생각하자. 그는 밥을 한 숟가락 크게 퍼 입에 넣으려던 참이었다.
"오셨습니까."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그렇게 말하기에, 그는 순간 놀라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내가 보이나 지금.......? 그러나 그는 조만간 웃으며 밥을 마저 먹었다. 한 번씩, 아무것도 안 보이면서 무언가 보이는 척, 방 한 구석에 대고 '거기 있는 거 다 알아요'라고 외치던 소년 시절의 자신을 떠올린 것이다.
"왔어요 왔다고요, 저세상에서요-."
그래서 일부러 옛날 만화 노래나 부르며 뼈다귀를 손으로 뜯어나갔다. 비닐장갑이라도 주면 어디 덧나나. 요즘 애들은 센스가 없어. 젊었을 때 제일 싫어하던 말이 '나 때는 말이야'였음에도, 어느덧 그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이 늙고 죽으면 어쩔 수 없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인 가봐, 그는 생각했다.
"믿음직한 내 조상님 소개합니다아-. 그 이름은...... 어?"
노래를 거의 끝내가며 살점이 붙은 뼈 하나를 집어 들었을 때, 그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 다시금 멈추었다.
소년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틀림없다.
그의 눈빛은 허공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자신의 눈,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영혼이 모여 있는 곳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맞은 편의 소년은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했다. 그리고는 예고 없이 나타난 조상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는지, 아니면 그저 조상님이 배가 고파 보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꽤나 어색한 말을 내뱉었다.
"마, 마저 드세요."
"어, 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왔다. 그보다 '마저'라니. 예의 없으면서도 고풍스러운 단어를 쓰는 소년이었다.
너
"네가 어떤 일을 겪고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좀 되새겨봤으면 좋겠어. 네가 그 감정이 왜 일어났는지 너 자신한테 잘 물어봤으면 좋겠어. 네가 너 자신을 학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는 아마,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계속 너를 괴롭혀왔을 거야. 근데 안타깝게도 너는 어른이 되지는 못했어. 너는 그저 학대당한 어린아이인 채로 지금껏 세월을 보내왔어. 근데 학대한 가해자는 너다? 너는 누구에게도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어. 너는 너에게만 용서를 구할 수 있고, 그리고, 너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도, 너야. 너밖에 없어."
나
"너는 너를 믿어야 해."
나는 나를 믿어야 해.
"무슨 일을 하든, 너 자신을 못 미더워하며 하는 일이 잘 될 리가 없잖아."
항해
어느 날인가부터 타고 있던 배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는 스며드는 바닷물에 옷이 젖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배 위에 있던 것들을 하나씩 버려나가며 균형을 맞춰야만 했다. 하나같이 무척 소중한 것들이었다. 나는 매번 망설였지만, 망설일 시간조차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곧이어 신이 나타났다. 내가 물었다.
'이미 많은 걸 포기했어요. 그런데도 왜 계속 나아가야 하죠?'
그러자 신이 답했다.
'배 위를 보세요. 거기 남은 것들이 이유예요.'
나는 뒤를 돌아보고 다시 물었다.
'하지만 이 배는 계속 멈춰 있는걸요.'
그러자 다시 신이 답했다.
'아뇨. 계속 나아가고 있어요. 당신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
마법
"섭섭한 것도 불쾌한 것도, 그냥 그 자리에서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면 안 될까. 만화 같은 데에서는 한 화나 두 화 안에서 끝날 갈등을 나는 두 달째 겪고 있어. 이유도 몰라, 해결될 가능성도 없어 보여. 나는 숱한 짐작들만 늘어놓고, 정답인지 오답인지도 모를 짐작들에 불안해해."
"너에게 마법이 있었으면 좋겠어."
"마법?"
"응, 마법. 내일의 네가 나아질 수 있는 마법."
고삼 타임캡슐
"나 실은 미래에서 왔어."
그녀가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수능이 끝난 다음날이었고, 우리는 한밤중에 모종삽으로 고등학교 뒤뜰의 흙을 파고 있었다. 옛날 만화를 보다가 타임캡슐을 묻는 장면을 접하고, 내가 같은 반이었던 그녀에게 권했던 탓이다. 나는 예상보다 수능 성적이 애매하게 나와 불안해하던 상황이었다. 그 불안에 잠식당해 있었고, 그랬기에 평소 친하지도 않았던 그녀에게 타임캡슐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애초에 타임캡슐 같은 이야기를 꺼냈을 때 호응해 줄 만한 사람이, 평소 사차원스럽던 그 아이밖에 없었기도 했다.
나는 설정을 맞춰주듯 말했다.
"미래에서 왔으면, 미래의 나도 만났겠네."
"그렇지. 궁금해서 전화를 한 번 했어."
"나한테 전할 말은 없대?"
"있대. 내가 물어봤더니 있다던데. 나중에 한번 봐봐. 써놨어."
그녀가 곱게 접힌 편지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내가 낚아채 그것을 펼쳐보자, 거기에는 아무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녀는 또한 의미심장한 말을 했고, 나는 여전히 그녀의 컨셉이 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참이 흘렀다. 나는 고생 끝에 결국에는 원하던 대학교를 들어갔고, 졸업 후 일자리를 찾아 나름 열심히 살다가, 그녀의 존재도, 타임캡슐도 잊어버린 채 어느덧 머리가 하얀 중년이 되었다.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경중을 따지는 일은 불필요했다. 시간이 지나니 모든 일들이 그럴싸한 그리움을 띠며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가 나의 인적 사항을 물었다. 젊었을 때는 그런 불길한 전화를 거절하면서 살았지만, 나이가 들자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아졌다. 어느새 상대방의 정체도 모른 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간 어떤 것들을 이루며 살았고, 지금의 자신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긴 통화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상대방이 대뜸 물었다.
'고3 때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그리고 나는 고민 끝에 대답을 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들을 것을 다 들었다는 듯이 어떤 마무리 멘트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 순간, 고등학교 때 묻은 타임캡슐을 떠올렸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고등학교 뒤뜰로 향해 손으로 타임캡슐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회색 통이 나왔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그것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거기에는 내가 묻은 편지와 함께 그녀가 보여줬던 편지가 있었다. 편지에는 안부 인사도 없이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네가 고3 때의 너에게 전하고 싶어 하던 말은 딱 하나였어.
'생각보다 사소한 일이었어요'라고 했어.
그럼 안녕. 좋은 여생이 되기를.
곁
"왜 내 인생은 항상 불행이 따라다니는 것 같을까?"
"뒤에 돌아봐 봐."
"응? 왜?"
"누가 있어?"
"아무도 없는데."
"것 봐. 누가 널 따라다니냐. 다 착각이야, 그냥."
"진짜네."
"대신 네 옆에는 내가 있고."
이야기
"지금까지 인류는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왔고, 앞으로 인류가 사라질 때까지 새로운 이야기는 계속 만들어질 거야. 그러니 사람은 죽을 때까지 무식할 수밖에 없어. 삶이 끝날 때까지 사람은 지구상의 모든 이야기는커녕 한 나라의 이야기조차도 전부 읽지는 못 할 테니까. 석유나 돈, 음식이랑 다르게 이야기는 영원히 고갈되지 않아. 그 영원함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안해져.
죽고 싶어질 때마다 뭐가 너를 살렸나 떠올려 보면, 책,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같은 것들이었지. 여기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이 매 순간 너를 죽음에서 삶으로 옮겨줬어. 너의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일들로 전개될 예정이야. 그러니 부디 어떤 일이 있든 삶에 대한 희망을 놓지는 말기 바라. 이야기를 다루는 사람이 펜을 멈추는 건 게으른 일이고, 자기 이야기를 진부하게 만드는 건 직무유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