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는 일은 꽤 의미 있는 일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요. 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싸움과 사건사고가 많은 해였어요. 논문은 떨어진 줄 알았는데 붙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는 멀어지고, 멀어지고 싶은 사람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못한 그런 다사다난한 해. 성장하지 못한 자신을 보며 언제쯤이면 내가 원하는 '나'가 될지 골머리를 앓지만, 그래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냥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끊임없이 쓰고, 끊임없이 읽고 즐기기를.
(7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결혼
주례를 맡은 아빠는 여느 때처럼 침착한 표정이셨다. 그러나 드레스를 입은 딸의 모습에 울컥하셨는지, 목소리가 점점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감정이 풍부하신 분이었나? 나는 나중에 아빠를 어떻게 놀릴지 생각하며 웃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를 위로해 주며 살기 바란다."
그 말에 앉아 계시던 엄마가 중얼거리셨다.
"싸울 일 있으면, 싸워야지......."
추억
"저번에 맡겨 주신 교복 마이 말씀인데, 저희 직원의 실수로 변색이 좀 심해졌습니다."
나는 문자로 날아온 교복 사진을 보았다. 중학교 때 입었던 교복을 오랜만에 찾아내어 세탁을 맡긴 것이었는데, 확실히 색이 많이 변해 있었다. 업체에서는 돈으로 배상해 주겠다고 이야기했고, 현금으로 배상을 받으면 교복은 폐기 처분될 예정이었다.
"아니 뭐, 괜찮아요. 오래 입을 것도 아니고. 추억 삼아 갖고 가게 그냥 주세요."
그래도 조금 궁금한 마음이 들어 물었다.
"배상해 주시면 혹시 얼마까지 가능할까요?"
"음, 이 정도면 13만 원까지 배상해 드려요."
나는 추억은 가슴에만 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좌 불러드리면 될까요?"
적금
-한다면 하는 분이군요, 대단해요.
적금 만기일이 되자 그런 내용의 문자가 날아왔다. 3년 간 통장에 손을 대지 않고 버틴 것을 칭찬하는 문자였다. 나는 그냥 버티고, 기다렸을 뿐인데. 난데없는 칭찬에 조금 의아하면서도, 기분은 좋았다.무언가를 버티고 기다리는 일에, 칭찬을 받은 적은 드물었기 때문에.
콩밭
오전에 나는 다니던 곳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내가 무척 태연해졌다고 생각했다. 사수가 조용히 나를 불러, 요새 넋이 나가 있는 것 같아, 라고 이야기했다. 그때 나는 '넋'이라는 글자의 발음에서 매우 뻑뻑한 느낌을 받았다.
그날 밤 나는 꿈에서 안개 낀 길을 걷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니, 드넓은 밭이 펼쳐져 있었다. 수확이 끝난 듯 딱딱한 흙 위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골개 한 마리가 앞발로 내 다리를 긁었다. 그리고는 따라오라는 듯, 밭과 밭 사이에 난 좁은 길로 나를 이끌었다.
안개와 안개, 밭과 밭이 무한하게 펼쳐진 이곳에서 나는 작디작은 강아지의 발걸음에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흰 안개, 흰 강아지, 흰 길과 대조를 이루듯 새까만 개가 길 중앙에 버티고 서 있었다. 개의 몸집은 사람만 해서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 개는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어떤 악의를 느꼈다.
그러나 큰 개는, 그걸 악의로 느끼든 말든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듯, 눈을 한번 느리게 깜빡였다. 그리고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개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분명히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이 밭 어딘가에 너의 심장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굶주려 있지. 우리는 너의 심장을 발견하자마자 갈기갈기 찢어먹을 것이다. 그걸 원치 않는다면, 먼저 되찾는 게 좋을 거야.
나는 황급히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둘러 밭으로 내달렸다. 울퉁불퉁한 지면을 가로지르면서 몇 번인가 고꾸라졌다. 개 짖는 소리가 사납게 들렸다. 여기 있는 나를 노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 광활한 공간 어딘가에 있을 심장을 먹으려고 개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소리였다.
찾아야 한다. 까진 손톱을 감싸며 일어섰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내 심장이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온전히 내 것이었으니까. 늦기 전에 찾아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정체
집에 가고 싶다. 나는 집에서도 가끔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정작 지금의 나는, 집에 가지도 못하고 앞차와 뒤차 사이에 가로막혀 있지만.
벌써 긴 시간 동안 같은 위치에 멈춰 있는 듯했다. 차를 버리고 탈출하고 싶지만, 그 정도로 무모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퇴근 시간이었고, 다들 어딘가로 바쁘게 향하고 있었다. 앞유리 너머로 차들이 쭉 이어져 있었다. 맨 앞에서 달리고 있을 자동차에게 의문을 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기에 길이 이렇게 막히는지. 신호 체계가 원래 엉성했을 가능성도 잠시 생각해 보았다. 늑장을 부리다가 이제야 차를 몰고 온 내 잘못일 가능성도 잠시 생각해 보았다. 과실을 나누는 사이, 의미 없이 신호등만 한번 더 바뀌었다.
무언가를 구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연극이라든지, 소설이라든지, 아니면 레시피라든지. 그러나 히터에서 나오는 따뜻한 바람이 모든 것을 귀찮게 했다. 아니, 히터 핑계를 대긴 했지만, 어쩌면 그 이전부터 내 상상력은 점점 굳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귀차니즘에 의해. 불규칙한 습관에 의해. 흔히 이야기하는 도파민 중독에 의해.
차라리 배가 고프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나에게 부족한지 알고, 그것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부족함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배는 적당히 불렀다. 배가 불렀어, 돌아가신 할머니는 분명 그렇게 말씀하시겠지. 입은 험하셨지만, 손자의 증상만 보고도 어떤 병인지 기가 막히게 아시던 우리 할머니. 그렇다면, 지금 손자의 부른 배 위에 따뜻한 손을 갖다 대시면서, 이 알 수 없는 기분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좀 진단해 주셨으면. 그런 점에서 나는 자꾸만 집에 가고 싶어지나 보다.
크리스마스
한밤중에 산타와 눈이 마주쳤다.나는 침대에 있었고, 산타는 서랍장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큰 보자기에는 전 세계 아이들에게 줄 선물이 담겨있는 듯했다. 산타의 손에 시계가 들려 있었다. 내 시계였다.
"그거 제 시계......"
그러자 산타는 보자기 속에 시계를 집어넣으며, 당황도 하지 않고 말했다.
"호호호, 메리 크리스마스."
"지금 제 시계 넣으신 거예요?"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나? 우리 꼬마 친구."
"모르겠고, 저 스물다섯이에요."
"행복은, 무언가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그것이 '행복'이었다고 깨닫는 법이지."
나는 약간 마음이 움직일 뻔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빠져 바로 경찰을 불렀다.
오후의 영화
인간이 된 지 얼마 안 된 그녀는, 인간이 싫어 며칠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겨우 들어간 직장은 그만두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점심이 다 되어서야 방에서 나온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점심밥을 보았다.
반찬을 덮고 있는 비닐랩 위에 편지가 붙어 있었다. 언니는 항상 '전자레인지에 30초 돌려먹어' 같은 간단한 말만 포스트잇에 써놓고 갔는데, 이번에는 종이도 크고, 문장도 꽤나 길었다. 그녀는 드디어 언니의 인내심이 다한 것인가 싶었다. 혹여 작별 인사를 써놓은 것은 아닐까 싶어, 불안한 마음으로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인혜야. 마음이 가라앉았을 때는 영화를 봐. 휴대폰으로 보지 말고 영화관에서 직접 봐야 돼? 만화는 직접 페이지를 넘겨야 되고, 넷플릭스는 귀찮으면 끄게 되지만, 영화관에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앉아 있어야 되잖아. 어쩔 수 없이 한 영화를 끝까지 보다 보면,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던 감정들이 떠오를지도 몰라. (나는 그랬어) 되도록이면 아무 영화나 보지 말고, 그래도 평점 좋은 영화로 봐. 요새 좋은 영화 많대.
아, 네 지갑에 영화표 넣어놨어. 기한이 오늘까지야. 너는 갈 수밖에 없을 거고. 히히. 왜인지 알아? 네 지갑에 있는 돈으로 산 영화표거든. 너무하다고 생각해? 원래 인생은 너무한 거야. 농담이고, 어차피 내가 준 용돈이잖아. 그러니까 핑계 대지 말고 바깥바람 좀 쐬고 와. 알았지? 밥은 꼬박꼬박 먹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