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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Feb 01. 2024

잘 먹고 잘 살아 외 7편

푸른여우, 하루하나 : 2024년 1월

  머리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입춘은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항상 1월 1일에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야지, 하다가 막상 바쁘게 살다 보면 시간은 금세 가버려요. 그러면 음력 1월 1일부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자고 스리슬쩍 말을 바꾸곤 합니다. 그게 바로 저예요.

    작년 초에 막연하게 '한 해가 이렇게 가겠지'라고 상상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정말 많았어요. 어쩌면 그런 돌발상황들이 있기에 우리는 내일도 오늘과 같겠지, 하고 함부로 좌절하지 않아도 좋은 것 같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길 바라요, 우리.

    (8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근데 몇 개가 좀 길어요)




 잘 먹고 잘 살아


   올해 10살밖에 안 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지......"

   러자 아빠가 툭 던지듯 얘기했다는 모양이다.

   "지금처럼 잘 먹고 잘 살 돼."





  귀여움이 세상을 지배한다


  "인간. 우리가 지구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왜 그렇게 단정하지? 자기 종족에 대한 자부심인가?"

  "아니. 너넨 너무 못생겼으니까. 곤충같이 생겨서, 찌르면 녹색 피나 나오고. 토 나와."

  "지구에선 그걸 외모지상주의라고 부르더군. 나는 우리 종족의 근엄한 외모가 자랑스럽다."

  "외모지상주의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아? 본능적으로 인간은 귀여운 외모에 끌리니까. 어쩔 수 없어, 이건 우주의 진리야."

  "그럼, 그대는 감히 우리에게 지구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건가?"

  "너희 종족은 몸 상태를 바꿀 수 있다고 했지? 혹시 자기 외모도 바꿀 수 있어? 어떤 형태로든?"

  "할 수 있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야."

  "그러면 자 여기 봐봐. 이건 요즘 애들한테 인기 있는 티니핑이라는 캐릭터고, 이건 어른들한테도 열광적인시나모롤이라는 캐릭터인데...... 얘는 몸이 솜사탕으로 되어 있고...... 특기가 큰 귀를 파닥거려서 하늘을 나는 거야."

  "잠깐. 저 개체들은 인간에게 공포를 심어주기엔 너무 부족한 것 같은데."

  "야야, 공포로 통치하는 거 안 먹혀. 너무 구닥다리야. 너 외계인 나오는 영화 봤지? 왜 거기 나오는 외계인들이 매번 퇴치당했겠어. 안 귀여우니까! 대세는 귀여움이야. 귀여움에서 돈과 권력이 나와. 너 특기가 뭐야?"

  "음, 전쟁터에서 적의 목을-."

  "봐봐. 안 귀엽다니까? 이래서는 지구 정복은 개뿔, 우리 집도 정복 못해. 한번 고민해 봐. 너 원래 행성에서 똑똑했다매."

   그로부터 마치 피팅룸에서 옷이라도 갈아입히듯, 나는 외계인을 방으로 들여보내 외형을 바꾸도록 지시했다. 나름 고민 끝에 모습을 바꾼 그가 방 밖으로 나왔으나, 나는 그럴 때마다 안 귀여워, 안 귀여워, 안 귀여워, 한참 그렇게 일갈했다. 그럴 때마다 외계인은 자기 종족의 근엄한 외모를 부정당한 것이 참을 수 없는 듯, 꽤나 자존심이 상한 눈치로 나를 째려보았으나, 나는 그 모습에도 '안 귀여워'라고 말하고 그를 다시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남들을 지배하려면 미소녀로 변하고, 여들을 지배하려면 미소년으로 변하면 된다. 그러나 모든 연령층을 사로잡으려면 귀여운 캐릭터로 변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일장연설을 하며 지구 종말을 앞당기고 있었다. 심지어는 격려도 했다. 설령 네가 인간 나이로 72세에, 생긴 건 말린 오징어같이 생겨서, 칼로 찌르면 초록 피가 나오는 끔찍한 외계인이면 어떠한가. 이제부터 너는 전 세계 어른들의 등골을 빼먹을 수 있는, 몸이 딸기우유 같은 것으로 가득 찬 2등신 찐빵 캐릭터로 거듭날 것이다. 그러니 노력하라. 노력하면 너도 지구를 정복할 수 있다. 너도 나도 야 나도. 자신감을 가져라. 새벽 2시가 되어서야 그는 그럴싸한 마스코트 캐릭터가 되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물을게. 너의 특기는 뭐야?"

   "치, 친구들이랑, 수, 숨바꼭질할 때......"

   "응."

   "두, 두 귀를 쫑긋 세워서 찾는......."

   "'쫑긋'에 악센트를 넣어. 그게 포인트야."

   그는 꽤나 굴욕스러워했으나 나는 부드러운 동물귀를 만지며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다.

   새벽까지 우리는 지구를 정복할 계획을 이리저리 짰다. 어떤 굿즈를 만들지 고민했고, 목소리 톤도 어떻게 내면 좋을지 궁리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꽤나 들떠있었지만, 정작 그는 꽤나 울분을 참고 있었던 것 같고,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 보였던 것도 같다.

   소파에서 잠깐 자고 일어났더니 외계인도 UFO도 온 데 간 데 없었다. 별다른 뉴스도 없었다. 그는 지구를 떠난 모양이다. 다만 화장실 거울이 산산조각이 나 있었는데, 별로 귀엽지 못한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자기 자신이 귀여운 줄 알아야 진짜 귀여움의 완성이야, 너는 그런 근성으로는 어떤 행성도 지배하지 못할 거야. 나는 속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꽈당



   잠시 뒤에 눈이 멎었다. 나는 슬리퍼를 대충 신고 밖으로 나갔다. 아스팔트길을 걸어가면서 머릿속이 점차 잡념들로 가득 찼다.

   '어제 내가 그렇게 얘기해서 걔가 화가 났나? 아니 그래도 내가 잘못한 건 아닌데. 아니지, 걔 입장에서는 무언가 트라우마 같은 게 있었을지도. 그러면 나는 화를 내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면 미안하다고 했어야 했나? 아, 나도 너무 숙이지 말고 대꾸는 좀 할 걸 그랬는데. 애초에 이런 걱정할 시간에 일이나 하나 더 끝마쳐 놓을 걸. 그랬으면 적어도 지금은, 아 열받아. 생각할수록 열받네. 그때 그렇게 하는 게 나았을 테-

   "으악!"

   꽈당-.

   이라는 효과음이 어울릴 정도로 나는 성대하게 미끄러졌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맞은편에 오던 아저씨는 잠깐 눈길을 주고 사라졌다. 내 몸은 아직 녹지 않은 눈더미에 감싸였다. 나는 흰 눈만큼이나 흰 하늘을 강제로 쳐다보게 되었다. 머리 좀 식혀, 신이 옆에 있었다면 아마 나한테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플러그를 뽑은 컴퓨터처럼, 머릿속이 순식간에 정전되었다. 허, 하고 나온 너털웃음만이 입김이 되어 사라졌다.






  눈보라


   눈보라가 흩날리는 산길을 걷고 있었다. 옅은 가로등 빛에 쌓인 눈이 반짝였지만, 바람이 세찬 탓에 앞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시끄러운 바람 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도 묻힐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입을 열고, 자신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어디서도 꺼내지 못했던 속마음을 꺼냈다.

    "아침 이슬이 사라지듯 나도 사라지고 싶다고, 그만큼 너를 그리워한다고, 천 년 전에 어느 시인이 그랬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는 추위에 잠시 머리가 멍해져 다음 문장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왜 그리워하는데 사라지고 싶어 할까, 죽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근데 이제 알 것 같아."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그는 옷깃을 한 손으로 꾹, 잡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파서 그랬던 거야. 아픈데, 그 사람에게 일말의 민폐도 끼치기 싫으니까. 그래서 사라지고 싶어 했던 거야, 흔적도 없이. 애초에 나라는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끝내 그의 입에서 '보고 싶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다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그럭저럭 사랑해요


   "나는 활활 타는 사랑을 원했어."

   외도를 들킨 당신은 그렇게 말했다. 평상시에 나는 당신의 그런 뻔뻔함을 존경했다. 너무도 뻔뻔해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그런 자신감을. 당신의 외도 상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뻔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해 주었다는 듯, 두 얼굴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너무도 뜨거웠다.

   한 달금세 지나갔다. 헤어진 그날부터 나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일을 했고, 잠을 잤고, 다시 일을 했다. 잠시라도 여유가 생기면, 머릿속으로 '활활 타는' 무언가가 생각났다. 불, 종이, 사랑 등등, 활활 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머릿속에서 재로 변해 갔다.


   "선배님은 이 일 좋아하세요?"

   같이 밥을 먹던 직장 후배가 그렇게 물었다. 아마도 한참을 책상에만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그러는 거겠지. 나는 대충 대답했다.

   "그럭저럭."

   그러자 후배는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그런데. 그럭저럭이요."

   그로부터 우리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묵묵히 밥을 먹는 사이,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했던 말을 돌려받았을 뿐인데. 그럭저럭.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너무 가식적이지 않은 그 말. 그렇기에 오랫동안 진실된 감정만을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회사에 목숨을 바치라던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었나 보다.

   나는 그날밤 처음으로 제시간에 잘 수 있었다.




  용기


   "너 진짜 크게 되겠다."

   무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에게 언니가 이야기했다. 언니는, 자신에게는 그렇게 남들 앞에 설 용기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던 언니가 3월에 자신이 번 돈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나는 공항 유리벽 너머로 이륙하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 또한 언니처럼 행동할 수 있는 용기는 없다고.

   사실 조물주는 사람을 만들 때 각기 다른 용기를 불어넣었던 것은 아닐까. 그 양은 사실 사람마다 일정한데,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양도 다르게 보이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는 식견을 넓히기 위해 가진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용기가 없다. 언니에게 남들 앞에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국 어느 분야에서 자신의 용기가 발휘될 수 있는지를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 장례식에 놀러 오세요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 제가,

   이제 더 큰 사랑을 간직하려 합니다.

   앞날을 축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청첩장을 받았을 때 나는 시한부인 그가 결혼을 하는 줄로만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카톡에 첨부된 링크로 들어가 보니, 턱시도를 입은 신랑은 있는데 신부가 없었다. 그제야 아래쪽에 써진 큰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결혼식'이 아니라 '장례식'. 2월 1일 오후 5시. 강남 5성급 호텔. 문구를 쓰면서 웃음을 참지 못했을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선고받은 날에도, 그는 딱히 당황한 기색 없이 얘기했다. 아, 벌써요? 섭섭하다는 듯이. 시원섭섭. 누가 들었다면, 노래방 잔여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을 확인한 사람의 반응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친구였던 나는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미안, 장례식 준비한다고 너무 바쁘네, 라고 말했다. 2월 1일은 다음 주였다. 나는 그제야 그의 카톡이 장난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진짜로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청첩장을 받은 입장에서 기꺼이 어울려주어야 했다. 그러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되냐고,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자고.


   그날 나는 하던 일도 멈추고 그를 만나러 갔다. 그는 한층 핼쑥해졌지만, 표정은 여전히 밝아 보였다. 근조화환이나 조화는 필요 없다고 했다. 대신 꽃다발 하나를 사서 꽃 대신 사탕을 꽂아달라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나 팔고 있을 법한 그런 장난스러운 꽃다발을 받고 싶다고 했다. 조의금은 안 받는다고 했다. 마음 편히 죽을 정도의 돈은, 다행히 통장 안에 있다고 했다.

   만날 때는 아침이었는데,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밤이 되었다. 우리는 차 안에서 히터를 틀고 아까 산 츄러스를 나눠 먹었다. 나는 그에게 어쩌다가 미리 장례식을 하기로 했냐고 물었다. 그는 츄러스를 한 입 먹고 말을 이었다.

   "옛날에,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되게 갑작스러웠거든."

   "그랬지. 그때 나도 갔잖아."

   "근데 영정사진 옆에 앉아 있으면서 생각했어. 우리 부모님은 여기 있는데, 조문객들은 왜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걸까."

   "고인에 대한 예의 뭐 그런 거겠지."

   "그치. 근데 내가 부모님이었으면 좀 서운했을 것 같아. 나는 그래. 남들 놀고 있는데 혼자 방에서 자는 느낌. 뭔지 알아? 나 그런 거 되게 싫어해. 사람 왕따시키는 것도 아니고."


   당일이 되어 나는 잘 입지도 않던 정장을 꺼내 입고는 호텔로 향했다. 초대된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그와 알고 지내던 네다섯 명의 친구들 뿐이었다. 항상 카톡방에서 자기 이야기만 떠들어대는, 왜 만들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뜻에서 이름을 지은 '이무톡', 즉 '이게 무슨 톡인지 모르겠는' 방의 멤버들이었다. 그중에 지금은 쇼호스트로 일하는 한 친구가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사회를 맡은 모양이었다.

   "잠시 뒤면 우리, 오늘의 주인공이죠.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갈 준비를 마친, 멋진 신사분께서 나오실 예정입니다."

   분명히 박수를 작게 쳤는데, 홀이 넓은 탓인지 소리가 울렸다.

   "그럼 국민의례가 있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야 국민의례 누가 넣었어. 수련회냐?"

   "죽기 전에 한번 해보겠다잖아."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국민의례라는 것을 해보았다. 되새겨보니 고등학생 때 이래로 처음이었다. 자리에 앉은 후에는 직원들이 직접 코스 요리를 서빙해 주었다. 이름도 어려운 요리들이 차례대로 나왔다. 애피타이저, 그리고 스테이크가 나올 즈음에 오늘의 주인공이 단상으로 나왔다. 내가 정장을 갖춰 입은 게 무색할 정도로, 그의 옷차림은 무척 편해 보였다.

   "아름다운 밤입니다."

   올드한 멘트는 덤이었다.

   "항상 내일은 이무톡 나가야지, 나가야지 했는데, 결국 죽을 때까지 같이 있네요. 아주 지겨운 친구들입니다."

   옆에서 현직 부사관인 친구가 머리 위로 하트를 날렸다. 거기에 맞추어 우리도 다 같이 하트를 만들었다. 징그러워 죽는 줄 알았다. 아 징그러, 단상에 있던 그도 그렇게 말했다.

   "저 친구들이 저를 얼마나 좋아하냐면, 여소해 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한 번을 안 해줬어요. 참 징그러운 우정입니다."

   우리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도 억울한 부분이 있다. 우리도 여태 혼자 사는데 누굴 위해서 어떻게 여자를 소개해준다는 말인가?

   "더 말하면 입 아프니까, 그냥 노래 한 곡조 뽑고 끝내겠습니다."

   박수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는 나이에 안 맞게 아이돌 노래를 불렀다. 중간에 삑사리가 심하게 나서 한 명이 반주를 꺼달라고 했다. 식사는 오묘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5성급 호텔 요리는, 우리 눈에는 너무 어렵고, 양은 적고, 맛도 미묘했다. 5성급 별 거 아닌데? 맨날 밥 먹을 때마다 제일 늦게 자기 몫을 내던 백수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 그게 무척 웃겼다. 별 거 아니었다. 세상에 별 거 아닌 게 갑자기 많아 보였다. 그가 앞두고 있는 죽음도, 웃고 떠드는 사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폐회식이 다가오고 문을 나설 때, 나는 불이 꺼진 홀을 나서다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슬펐을까. 어떤 포인트에서 울음이 나온 것일까. 야 우냐? 친구들은 놀리기 바빴다. 정작 제일 슬플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내가 더 유난스럽게 울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다. 마치 자기가 죽는 것처럼 서럽게 곡소리를 이었다. 우리는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밤늦게 다시 집 앞에 있는 포장마차에 모였다. 아침에 출근하는 것도 잊은 채, 그날은 그냥 내키는 대로 서로 먹고 마셨다.

   그는 예상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는 직장에서 연락을 받았을 때 어안이 벙벙했다. 그 후로도 이무톡에서는 여전히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해댔고, 그것은 죽음을 앞둔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 부고 문자가 날아왔다. 장례식에 초대했던 그의 청첩장과 달리 문자에 담긴 어감이 무척 차가웠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한 사람만이 사라졌다. 나는 곧바로 택시를 탔다. 식장에 가서, 그가 땅속에서 잠들기까지, 분명 많은 시간이 걸렸을 텐데, 많은 시간이 걸렸을 텐데, 나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처럼 느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 집 아들, 죽기 전에 장례식 한 번 했다는데? 그럼 부정 타서 일찍 죽은 거네. 그리고 또 누가 말했다. 자기가 그렇게 일찍 죽을 줄 미리 알았나 보지. 생전 장례식에 참석했던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다만 나는 그를 천운이 따르는 사람이라고 여겨왔고, 또 그가 무척 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렇게 일찍 떠날 것을 스스로 예상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에게 천운이 따라줬기 때문에, 죽기 직전에 원하는 대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창문에 붙은 물방울들이 버스의 진동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흔들리던 물방울들이 서로 엉겨 붙어 하나가 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연응정


   -내 약하겠소. 일백 년이 가기 전에는 다시 오기로.

   꿈에서 나는 어떤 정자 앞에 있었다. 옆에서어떤 여자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정자의 이름은 '연응정'이었다. 인연 얽히고설킨다는 뜻이었다.

    잠에서 깨어 검색해 보니, 그곳은 여기 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작은 시골마을에 있는 정자였다. 밖은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가기에 그렇게 적절한 날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우산을 챙기고 차로 갔다. 이런 이야기들이 늘 그렇듯, 꿈은 사람 불가사의 방향으로 이끌었다. 와이퍼를 켰다.


     그는 강물이 불어났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연응정은, 그 얽히고설킨 인연들이 모두 과거의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듯 물에 잠겨 있었고, 지붕만이 아슬아슬하게 수면 위에 드러나 있었다. 성난 물결에 지붕마저도 떠내려가 버릴 것 같았다.

   '옛날에는 이 주변이 다 육지였대.' 동해바다를 보러 갔을 때 그 아이가 했던 말이었다. 어쩌다 보니, 지금 그 아이는 여기에 없었다. 어쩌다 보니, 정자는 물에 잠겨버렸다.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는 모든 게 끝난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자신의 환경에서 다시금 고개를 돌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져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끝내 그는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해 근처에 있던 어느 절에 들어섰다. 불상 앞의 촛불이 어두운 방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손을 모아 서툴게 무언가를 기원하고, 방 한 구석에 몸을 기댔다. 피로가 쏟아졌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지금, 여기요."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나요?

   그는 잠시 고민한 후,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난 뒤로 그의 마음은 언제나 과거에만 머물러 있었다.

   -기회는 한 번 뿐이에요. 이곳으로 데려오세요. 지금, 여기로.

   이런 이야기들이 늘 그렇듯, 기회는 한 번 뿐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잠결에 그는 수없이 사람들과 엇갈리는 상상을 했다.

 

   눈을 떴을 때, 그는 물에 잠긴 연응정의 지붕 위에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는 이따금 자신이 지붕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지붕 위까지 차오르는 흙탕물에 시선을 오랫동안 고 있으면, 자신사실 뗏목 같은 것에 올라타 있는 것이 아닐까 착각하곤 했다. 그가 연응정 지붕 위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에서는 세찬 비가 시끄럽게 쏟아 있었다. 금만 조용히 해줘. 그의 바람을 하늘은 언제든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자칫 몸의 균형을 잃 물 쪽으로 쓰러지면, 그대로 물살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비는 자신의 온몸을 적시고  얼마 없는 체온을 빼앗아갔다. 그는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낀 채로 벌벌 떨었다. 시기는 여름이었다. 더웠고, 습했고, 그 한편으로 기분 나쁘게 서늘했다.

    한 발치 앞에 죽음이 높여 있다고 생각하니, 여태껏 어딘가를 떠돌고 있던 자신의 마음이 이제야 비로소 몸에 강하게 붙잡는 듯했다. 그러면  거 아닌가. 이미 한 번의 기회는 끝난 거 아닌가. 그러나 부처님이 집으로 돌아갈 길을 마련해 주신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서도 육지가 보이지 않는데, 육지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발견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식을 물가에서 잃은 후로 그는 수영을 그만둔 지 오래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갈증이 날 때는 쾌쾌한 빗물이라도 받아 마셨으나, 배고픔은 해결할 길이 없었다. 휴대폰은 차에 두고 왔다. 낮과 밤만이 명암을 조금 달리 하여 그에게 얼마큼 시간이 지났는지를 알려주려 했다. 하지만 그에게 시간은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 지 오래였다. 그는 여전히 고장 난 손목시계를 차고 다녔다. 자신의 내부에서 엉망진창이 된 시간개념을 암시하듯. 그렇게 낮과 밤에 한 번씩만 맞는 손목시계처럼, 하루에 한두 번 정도만 제정신을 차리고 살았었다.

    그는 입고 있던 윗옷을 벗어 한번 얼굴을 닦았다. 점점 자신이 놓인 상황이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살이 일으키는 소음을 계속 듣고 있던 탓에 귀도 점점 둔해졌다. 그는 차츰 대담해져 흙탕물에 자신의 얼굴을 내밀어보았으나, 비치고 있는 것은 일그러진 그림자밖에 없었다. 그것은 여러 형태로 일그러지면서 그를 물속으로 현혹시켰다. 이 안에 당신이 찾고 싶어 하는 게 있어요, 라고 상냥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곧 갈게. 그가 마음속으로 누군가에게 말했다.

    그런데 저만치서 어떤 거대한 형체가 물살을 타고 빠르게 자신을 향했다. 그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그 물체를 덥석 집었다.

    두둑,

    하고 미끄러운 촉감과 함께 손톱에 얇은 비닐 같은 것이 묻어 나왔다. 왼손에서 그 물체가 미끄러졌으나, 그는 바로 반대쪽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상체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왼손에 묻은 것이 생선의 비늘이라는 것을 조금 뒤에 깨달았다.

   그는 지붕 위로 인어를 끌어올려 지붕 위 조심스럽게 눕혔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인어의 몸을 적셨다. 무척 평범하게 생긴 인어였다. 평범하지 않은 인어가 어떻게 생겼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멎었다. 크게 일렁이던 물결은 곧이어 잠잠해졌고, 인어의 옅은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주위는 고요해졌다. 그는 웃옷을 벗어 꾹, 쥐어짰다. 옷이 머금고 있던 빗물이 강물에 떨어져 하나가 되었다. 기와지붕에 햇볕이 드리웠다. 햇볕을 받은 인어의 몸이 점차 말라갔다. 그는 아직 물기가 남은 웃옷을 한번 털고는, 인어의 몸에 덮어주었다.


   꼭 인어공주 같네요. 아이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그날부터, 아이는 침대에 누워 종종 자신을 인어공주에 빗대곤 했다. 아이는 하루의 대부분을 천장을 보며 지냈다. 그리고 이따금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파닥이는 상상을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조용한 방 안에서, 수수께끼 같은 것이 아이의 주변을 맴돌았다. 인어는 상반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바다에서 숨을 쉴 수 없습니다. 또한 인어는 하반신이 물고기이기 때문에 육지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어는 둘 중 어디에 소속된 생명체일까요? 아이는 스스로 답을 내렸다. 인어는 바다에 빠지면 죽어버리니까 어쩔 수 없이 육지에서 살고 있을 뿐이에요. 사실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어요.

   -그래도 영화 보니까 바다에서도 숨 잘 쉬던데.

   -고증 오류예요. 아니면 영화적 허용이나.

   조금이라도 웃음을 주려 그가 던진 말에 누워 있던 아이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영화사에 신고해야겠네, 그렇게 농담을 하자 그제야 아이는 미소를 지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새벽부터 아이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매일같이 수영장에 데려다주었다. 처음에는 물을 무서워하던 아이가 어느 날인가부터 자신의 팔로 요령 있게 헤엄을 이어나갔다. 그는 헤엄치는 아이를 볼 때마다 영화 속 인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기대를 세상이 아니꼽게 여겼는지, 아이는 어느 날 강물에 잠긴 버스에서 목숨을 잃었다.


   거기까지 떠올리며 그는 무의식적으로 웃옷을 훑었다. 주머니에 있는 껌을 찾으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웃옷은 아까 벗어서 인어에게 덮어 둔 참이었다. 그가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인어는 어느새 웃옷을 입고 있었고, 하반신은 물에 잠겨 있었다. 인어는 물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 황급히 손을 뻗어 옷깃을 잡은 그는 이끌리듯이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저항할 새도 없이, 둘은 깊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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