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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Feb 28. 2024

물수제비 플러팅 외 9편

푸른여우, 하루하나 : 2024년 2월

  머리말


    수강신청 과목 중 '휴식학개론'같은 것이 없어서 항상 아쉬워하곤 합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잘 회복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시간을 좀 더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지, 그런 요령들을 터득했다면 겨울방학을 좀 더 알차게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모든 과거가 그렇듯, '그때 그렇게 할 걸' 하고 후회해도, 막상 살펴보면 우리는 그날그날 우리가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휴식을 취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요. 그래도 얼마나 좋아요. 열심히 산 우리를 위해 올해는 2월이 29일까지 있으니까요. 언제나 질투와 불안은 최악의 휴식을 만들어내니, 그 두 가지는 잠시 내려놓고 손님, 이 이야기들 좀 한번 읽어보소.

    (10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캬 오랜만에 10개네? 작년 여름부터 쓴 <연응정>도 드디어 완결이 났습니다)




  물수제비 플러팅


   "난 다음 생에 태어나면 돌멩이로 태어나고 싶어. 바닷가 자갈 같은 걸로."

   "그럼 난, 그 바닷가에서 너로 물수제비를 뜰게."





  절기


   살면서 '절기'라고 하는 것에 그렇게 관심을 둔 아이는 처음 봤다. 작년 여름에 무더위가 끊이지 않아서 내가 '여름 언제 끝나지?'하고 욕을 뱉고 있을 때에는, 그가 '이제 곧 입추라 시원해질 거예요.'라고 이야기했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실제로는 내가 훨씬 연상인데. 그리고 할아버지의 날씨 예측이 언제나 잘 들어맞듯, 날씨는 곧바로 선선해졌다.

   "오늘 입춘이래요."

   그리고 오늘 아침, 겨울바람이 아직 살벌한 시기에 그가 새로운 봄의 시작을 알렸다. 그 말을 듣고 밖으로 나서니 날씨가 포근해진 것도 같았다. 나는 이따금 그가 날씨를 관장하는 신이 아닐까 상상하곤 했다.






  뭐 어때


   어느 날,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늦은 밤 술에 취해 들어온 언니랑 식탁에 마주 앉았다. 왜 이제야 들어왔는지 물으니, 하루 종일 겪은 스트레스를 달래려 근처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왜 막막한 감정을 하염없이 털어놓았을까. 술에 취한 언니는 헤헤 웃으면서 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 어때. 잘못한 거 같으면 반성하고, 반성했으면 다시 안 그러면 되고, 안 그러기로 했으면 혼자 상상하지 말고, 상상 끝났으면 밖에 나가 놀아. 씩씩하게.






  지식


   "돈과 사람은 언제든 제 곁을 떠날 수 있지만, 지식은 온전히 제 것이 될 수 있잖아요. 적어도 치매 걸릴 때까지는 온전히 제 거니까. 전 그 영원불멸함이 좋아요. 그래서 공부가 좋아요."

   조수석에 앉아 진지하게 대답하는 학생을 보며, 담임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애가 자습을 째고 PC방을 가?"

   그는 도망간 학생을 체포해 학교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식 두 번째


   도망에 실패해 마저 자습을 하다가 그는 그만 잠들어버렸다. 꿈에서 그의 앞에 정약용 서 있었다. 그가 잠들기 전까지 펼쳐놓은 것이 한국사 교과서였기에, 그는 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를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정약용이 물었다.

   "그대는 지식을 예찬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니 참으로 모순되었소."

   "휴대폰으로 검색만 하면 다 나오는 시대라 그렇사옵니다."

   "그렇다면 그 지식은 그대의 것이 아니라 휴대폰의 것이로군. 도서관 근처에 집을 짓는다고 사람이 똑똑해지는 건 아닐세."

   는 휴대폰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대답했다.

   "그래서 도서관 곁에 꼭 붙어사는 거 아니겠사옵니까."

   "그럼 잠시 떨어져 보는 것도 좋겠군."

   그가 손을 펼치자 휴대폰 게임이 자동으로 켜졌다. 게임 노래가 너무 현실적으로 들려서 그는 잠에서 깼다. 눈앞에는 나이 든 선생님이 서 있었다.

   "자습 시간에 게임이나 하고. 오늘은 휴대폰 가져갈 테니까 내일 교무실로 와서 받아 가."





  우수雨水


   -마음에도 사계절이 있다면, 너는 나에게 어떤 계절을 줄 생각이야?

   다만 당신에게 준 계절이 겨울이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다. 여름이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다. 당신이 준 것처럼 따뜻한 봄을 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혹독한 계절을 주지는 않았기를. 쌓인 눈이 녹아 물이 되는 날씨였다. 지금 그쪽 세계에 내린 눈도 녹았을지, 그런 게 문득 궁금해졌다.





  피자 먹고 싶다


   지원동기를 구체적으로 기술해 주세요.(1000자 이내)

   -피자 먹고 싶다.


   1000자 이내로 써야 하는 회사 지원동기에 그렇게 단 몇 글자만이 쓰여 있었다. 여태 이 회사에 오고 싶어 하던 수많은 지원자들의 서류를 봐온 그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당돌한 자기소개서는 잠을 확 깨게 했다. 물론 통과시킬 수 없는 서류였다. 1000자 이내라는 말은 적어도 900자 이상으로, 자신이 이 회사에 왜 지원했는지 논리적으로 말해보라는 뜻이니까.

   그러나 그런 회사의 의도를 완전히 무시한 채, 이 지원자는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어떤 피자가 먹고 싶은지도 얘기하지 않고, 그저 피자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는 어이가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다른 지원자의 서류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거니까, '피자 먹고 싶다'는 말은 지원동기로 틀린 말이 아니기는 해. 돈을 벌지 못하면 피자를 먹을 수 없지. 가까스로 피자를 사 먹더라도 치즈 크러스트는 기대할 수 없다. 피클도 서비스로 받기를 기대해야 한다. 어쩌면 이 지원자는 그렇게, 돈으로 사람이 결핍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말해보려 했는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전화가 왔다.

   -저기, 제가 지원서를 잘못 보내서요...... 저장하기 전의 것이 가 가지고...... 죄송합니다....... 저, 다시 보내도 괜찮을까요.......?






  미지수


  "아직 여기서 잘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걸요."

  "그 미지수를 돌파해 내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니까."






 마도서의 머리말


    "파스를 예로 들어 봅시다. 파스는 상처 부위를 직접 낫게 해 준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진통제 역할만을 합니다아픔을 줄임으로써 근육을 좀 더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원리입니다. 어떤 근육통은 가만히 있는 것보다도, 계속 움직여줘야만 회복 가능합니다.

    마음의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울이 들이닥쳤을 때 가만히 쉬는 것도 도움이 되긴 합니다. 그러나 만약 오래 쉬었는데도 병이 낫지 않는다면, 그때부터는 다양한 사람, 다양한 공간에 자신의 마음을 내던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에 기술된 마법의 효과는 의학적으로 검증된 바가 없습니다. 다만 당신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금 느끼는 불안과 아픔을 잠시 동안 줄여줄 뿐입니다. 보다 악화된 상황에 관해서는 전문의와 상담해 주세요."






  연응정 (결)


   강물 깊은 곳으로 가라앉으며, 그는 이미 가라앉은 수많은 사연들과 스쳐 지나갔다. 한 때 서로 인연을 맺었으나 끝내 엇갈려버린 사람들.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이야기했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전쟁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사람들. 그렇게 엇갈리는 인연들이 연응정의 밑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인연이라는 건 애초에 엇갈림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눈을 떠보니 그는 자동차 안에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 작동하지 않는 액셀을 꾹 누른 채, 허리까지 물이 차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문 손잡이는 아무리 당겨도 반응이 없었다. 빠져나갈 길은 없었고, 유리 너머에는 흙탕물이 가득했다. 한 치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온몸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것이 묘하게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몇 번인가 빠져나가려고 시도하다가, 문틈으로 빠르게 들이닥치는 물줄기를 어찌하지 못한 채, 무의미한 발버둥을 멈추었다. 이윽고 자신의 몸을 가만히 둔 채, 머릿속으로 그 아이에 대한 것들만을 떠올리기로 했다. 계속. 큰 강에서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헤엄치고 있는 인어를 생각하기로 했다. 계속. 계속해서.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립다고 말하면 참을 수 없어질까 봐, 여태 그런 말들을 참아왔었다. 그러나 목 위까지 물이 차오르고, 이윽고 사방이 먹먹해질 때, 그는 얼마 머금지 못했던 숨으로, 보고 싶다, 라고 말했다. 그것은 분명한 목소리가 되지는 못한 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차 안은 정적으로 휩싸였다.

   똑.

   똑.

   똑.

   분명히 노크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옆 유리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뜨고, 흙탕물 사이로 보이는 형체를 눈으로 좇았다. 인어였다. 인어는 조용히, 차 안에 있는 자신을 부르듯이 똑, 똑, 간격을 두고 차창을 두드렸다. 그는 팔을 뻗어 문 손잡이를 당겼다. 덜컥,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있는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차 밖으로 튕겨져 나온 그는 물살에 휩쓸렸다. 순식간에 인어와의 거리가 멀어졌다. 그는 눈으로 들어오는 흙을 아파하면서도, 손을 뻗어 어떻게든 인어에게 닿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그 아이의 손을 잡지 못한 채, 그는 바깥으로 밀려나버렸다. 시야에서 점차 작아지는 그 아이는 분명히 자신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는 잘 살 테니, 당신도 부디 잘 살아주세요. 그렇게 얘기하고 싶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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