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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Apr 03. 2024

미라클 모닝 외 6편

푸른여우, 하루하나 : 2024년 3월


  머리말


    오늘까지만 놀아야지, 오늘까지만 놀아야지, 하다가 오늘만 사는 사람이 된 지 벌써 몇 개월인지. 무슨 일이든 시작을 하려 한다면 바로 지금, 이때부터 시작해야지, 라고 하지 말고 '지금'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새로운 학기를 맞는 3월은 생각보다 바빴어요. 오늘은 어떤 글을 빚을까 생각하는 것보다도, 계획서랑 보고서 쓰는 데에 진이 다 빠져버렸달까요.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가끔씩 빚게 되는 이러한 글들이 저 자신에게는 좀 더 위로가 되는 것 같다고 느끼는 요즘입니다. 그런 위로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사치스러운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바람은 항상 갖고 있어요.

    (7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경칩驚蟄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그날은 비가 내렸다. 겨울에는 잠만 잤다. 콧잔등에 맺힌 이슬을 앞발로 훑었다. 나는 동굴 앞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이번 봄은 도무지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잠들기 전에 바랐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 일족은 여전히 스스로 먹이를 찾아야 했고, 언제든 더 큰 짐승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었다. 불안을 떨쳐보려 한숨을 쉬었다. 하얀 입김이 나왔다.

   "잘할 수 있을까?"

   그렇게 중얼거리니, 뒤에 있던 아빠가 말했다.

   "작년 이맘때도 그러더니. 재작년, 그전 이맘때도."

   "그래요?"

   "그럼. 어릴 때부터 그랬어. 그렇게 불안해하고는, 언제든 잘 헤쳐나갔으면서."





  엑스트라


    어느 작가가 등장인물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을 따로 불러내 물었다.

   "다음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태어날 예정인데, 괜찮으시죠?"

   "아뇨. 주인공은 사양하고 싶어요. 무언가를 책임지는 것이 지금의 저에게는 너무 버거워요."

   "그럼 엑스트라로 태어나고 싶으시다는.....?"

   "엑스트라요?"

   그러나 '엑스트라'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는 조금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책임질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기 삶에 있어서는 여전히 주인공이고 싶은 것인지. 


 



  미라클 모닝


   -이제 가볼게.

   문자를 보고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방은 받지 않았다. 이미 전파가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난 모양이다. 전날 밤에 나는 분명히 결심했다. 오전 중에 연락을 해보기로. 그러나 매일 아침 그러했듯, 나는 오늘도 씩씩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불속에서 반나절이 지났고, 그 사람은 그렇게 떠났다.


   -편지 쓸게요.

   언제 닿을지 모르는 문자를 남기며 나는 또 다짐했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지. 씩씩해지지는 못하더라도, 위험한 이불 밖으로 나가봐야지. 그리고 편지를 쓸 생각이다. 이곳 아침은 여전히 쌀쌀하다고, 거기는 어떻냐고. 가식이나 거짓말 없이, 자연스럽게 진심을 담아서.






  노비의 날


   회사 점심 메뉴로 떡국이 나왔다.

   오전 내내 물건 수를 셌던 탓인지, 나는 떡국을 먹으면서도 떡 개수가 몇 개인지를 무의식 중에 세고 있었다. 근데 기이하게도, 내 나이랑 딱 맞게 떡이 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본 영화에서는 막걸리가 기포를 통해 모스부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영화를 본 탓인지 나는, 분명 우연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떡국이 나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인가 싶었다.

   집에 와서 지식인에 질문을 올렸다. 오늘 회사에서 떡국 떡이 나이만큼 들어있었다고. 하늘이 생일을 축하해 주려나 봐요, 같은 답변부터, 할 짓 더럽게 없다고 시비를 거는 답변도 있었다. 그런 중에 한 답변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음력으로 2월 1일이래요. 이 날은 머슴날이라고 해서, 한 해 동안 일할 노비들을 위해 떡을 만들어주었다고 합니다. 나이떡이라고 하는데, 노비의 나이만큼 떡을 주었다고 해요. 아마 회사에서도 님을 위해 나이떡을 마련해 준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유추해 봅니다.

   나는 그럴싸하다고 느끼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춘분春分


   어느새 당신이 사는 세계는 밤보다 낮이 더 길어졌다. 

   어릴 적의 당신은 밤이 일찍 찾아오는 겨울을 기나길다고 느끼며, 방 한구석에서 매일 봄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올해의 당신은 낮과 밤의 시간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애써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그냥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찾아서 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되면, 그날 저녁에는 먹고 싶었던 것을 먹었다. 누군가가 그런 당신을 보고 시니컬해졌다고 했다. 시니컬해진 당신은 더 이상 봄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좋았다. 그렇게 어느새 당신이 사는 세계는 밤보다 낮이 더 길어졌다.




  옥상


   -만약에 내가 없어지면, 그때는 저기 옥상에 한번 올라가 봐.

   나는 밤길을 걸을 때는 항상 노마의 손을 잡고 있었다. 노마는 도중에 멈춰 서서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높은 건물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비스듬히 올려다본 건물의 옥상에는 외롭게 불빛 하나만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그 건물은 폐쇄된 지 오래되었기에 입구가 언제나 잠겨 있었다.

   노마는 지병이 있었다. 내가 기말고사를 치던 날에 노마는 조용히 숨을 거뒀다. 나는 노마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도망치듯이 마을을 떠났다. 마을을 떠난 뒤 낮에는 공부를 했고, 밤에는 일을 했다.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끝내는 동네 서점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나는 결국 노마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노마는 그 마을에서 동네 책방을 운영하고 있었으니까.

   그 해 여름에, 나는 서점에서 책 정리를 하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그날은 노마의 기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어느새 평소 가지 않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비탈길을 내려가던 중에 흰색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건물을 발견했다. 그 건물은 검은색 계단이 크리스마스 트리에 걸린 꼬마전구처럼 감겨 있었다. 건물을 둘러싼 나선계단은 옥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건물을 쫓아 나선계단에 발을 디뎠다. 한 계단, 한 계단 밟아나갈 때마다 끼익, 끼익 하는 불길한 소리가 고요한 밤에 울려 퍼졌다. 계속 같은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마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끝없는 계단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숨이 차오르고, 윗옷이 땀으로 젖어갈 즈음 옥상에 다다랐다. 옥상에는 외롭게 전등 하나만이 켜져 있었다. 마치 이곳이 목표지점임을 겨우 표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콘크리트로 된 옥상에 주저앉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건물들이 무척이나 작게 느껴졌다. 그제야 노마가 했던 다음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만약에 내가 없어지면, 그때는 저기 옥상에 한번 올라가 봐. 여기 있었던 모든 일들이 얼마나 작은 일이었는지를 알게 되면, 슬퍼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슬프더라도, 울지 않을 수 있으니까.





  다시금 벚꽃


   작년 이맘때, 나는 아빠랑 드라이브를 가며 벚꽃을 보고 있었다. 내년 이맘때에는 뭘 하고 있으려나. 밀려오는 불안에 내뱉은 말이었다. 아빠가 그러셨다. 벚꽃 보고 있겠지.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면서도 내심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올해에 나는 벚꽃을 보지 못했다. 일주일 넘게 바쁘게 살다가 벚꽃이 그새 다 져버렸던 것이다. 나는 일을 끝내고 아빠랑 통화하면서 그 얘기를 했다. 작년에는 그렇게 예측했는데, 올해는 일하느라 벚꽃도 못 봤다고. 그러자 아빠가 그러셨다. 당연한 것 같은 예측도 틀리는 게 인생이라고. 그러니까 너무 자기 인생을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뭔 소리예요 갑자기, 라고 얘기하면서도, 매번 불안에 떨고 있던 나를 보며 아빠는 언젠가 그런 얘기를 하고 싶으셨나 보다.

   나는 그래도, 아무리 예측 불가능한 미래라도, 내년 이맘때는 또 가족끼리 벚꽃을 보러 갔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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