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 하루하나 : 2024년 3월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가끔씩 빚게 되는 이러한 글들이 저 자신에게는 좀 더 위로가 되는 것 같다고 느끼는 요즘입니다. 그런 위로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사치스러운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바람은 항상 갖고 있어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그날은 비가 내렸다. 겨울에는 잠만 잤다. 콧잔등에 맺힌 이슬을 앞발로 훑었다. 나는 동굴 앞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이번 봄은 도무지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잠들기 전에 바랐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 일족은 여전히 스스로 먹이를 찾아야 했고, 언제든 더 큰 짐승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었다. 불안을 떨쳐보려 한숨을 쉬었다. 하얀 입김이 나왔다.
"잘할 수 있을까?"
그렇게 중얼거리니, 뒤에 있던 아빠가 말했다.
"작년 이맘때도 그러더니. 재작년, 그전 이맘때도."
"그래요?"
"그럼. 어릴 때부터 그랬어. 그렇게 불안해하고는, 언제든 잘 헤쳐나갔으면서."
어느새 당신이 사는 세계는 밤보다 낮이 더 길어졌다.
어릴 적의 당신은 밤이 일찍 찾아오는 겨울을 기나길다고 느끼며, 방 한구석에서 매일 봄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올해의 당신은 낮과 밤의 시간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애써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그냥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찾아서 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되면, 그날 저녁에는 먹고 싶었던 것을 먹었다. 누군가가 그런 당신을 보고 시니컬해졌다고 했다. 시니컬해진 당신은 더 이상 봄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좋았다. 그렇게 어느새 당신이 사는 세계는 밤보다 낮이 더 길어졌다.
-만약에 내가 없어지면, 그때는 저기 옥상에 한번 올라가 봐.
나는 밤길을 걸을 때는 항상 노마의 손을 잡고 있었다. 노마는 도중에 멈춰 서서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높은 건물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비스듬히 올려다본 건물의 옥상에는 외롭게 불빛 하나만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그 건물은 폐쇄된 지 오래되었기에 입구가 언제나 잠겨 있었다.
노마는 지병이 있었다. 내가 기말고사를 치던 날에 노마는 조용히 숨을 거뒀다. 나는 노마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도망치듯이 마을을 떠났다. 마을을 떠난 뒤 낮에는 공부를 했고, 밤에는 일을 했다.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끝내는 동네 서점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나는 결국 노마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노마는 그 마을에서 동네 책방을 운영하고 있었으니까.
그 해 여름에, 나는 서점에서 책 정리를 하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그날은 노마의 기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어느새 평소 가지 않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비탈길을 내려가던 중에 흰색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건물을 발견했다. 그 건물은 검은색 계단이 크리스마스 트리에 걸린 꼬마전구처럼 감겨 있었다. 건물을 둘러싼 나선계단은 옥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건물을 쫓아 나선계단에 발을 디뎠다. 한 계단, 한 계단 밟아나갈 때마다 끼익, 끼익 하는 불길한 소리가 고요한 밤에 울려 퍼졌다. 계속 같은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마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끝없는 계단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숨이 차오르고, 윗옷이 땀으로 젖어갈 즈음 옥상에 다다랐다. 옥상에는 외롭게 전등 하나만이 켜져 있었다. 마치 이곳이 목표지점임을 겨우 표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콘크리트로 된 옥상에 주저앉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건물들이 무척이나 작게 느껴졌다. 그제야 노마가 했던 다음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만약에 내가 없어지면, 그때는 저기 옥상에 한번 올라가 봐. 여기 있었던 모든 일들이 얼마나 작은 일이었는지를 알게 되면, 슬퍼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슬프더라도, 울지 않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