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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May 09. 2024

지구가 자전을 이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외 6편

푸른여우, 하루하나 : 2024년 4월

  머리말


   햇빛이 선명하게 나뭇잎을 핥고 있어요. 벌써 한 해가 1/3이나 지나갔다니 지구가 제정신인가 생각합니다. 혹시 저희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지구가 저 혼자 빠르게 돌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요? 괜한 의심이 듭니다.

   이번 달은 정말로 글의 소재도 없고 글을 쓸 여력도 없었습니다만, 어느 날 긴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다른 과제도 잊어버리고 기력이 달릴 때까지 아래의 글들을 써 내려가고 있었어요. 절기가 묘하게 안 맞아 제출을 고민하다가 벌써 5월 초순이 가버렸습니다만, 이번에 준비한 내용들은 사실 4월에 이미 다 초안은 되어 있었답니다...... 하하. 변명이 구차해질 것 같으니, 저는 또다시 타이틀처럼 지구 탓을 하는 수밖에요. 지구가 자전을 이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상한 건 저예요, 알고 있어요.

    (7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청명淸明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내가 살던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벌초나 도우러 와라. 여긴 늙은이들밖에 없어서 힘들다. 오랜만에 전화를 하신 책방 아저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 말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었다. 말도 없이 떠난 데에 대해서는 아무 책망도 하지 않을 테니, 늦기 전에 한 번은 마을로 와라. 보고 싶다는 말이 서툰 아저씨들은 가끔 누구보다도 비유를 선호하시곤 했다.

   그리고 아저씨는 말했다. 노마가 나에게 묘비에 쓸 문구를 부탁했었다고. 나는 그 말을 들은 다음 날, 연차를 내고 기차를 예약했다. 햇빛이 선명한 어느 봄날이었다.


   며칠 동안 나는 책방 2층에 있는 아저씨의 작업실에서 지내게 되었다. 아저씨가 하루 정도 마을로 나가 있는 사이, 나는 밤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노마는 나에게 부탁했다. 긴 시간 동안 남을 자신의 마지막 말을.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나는 노트에다가 노마와 나눴던 이야기들을 밤새 끄적여 갔다. 그러나 어떤 말도, 노마의 삶을 나타내기에는 분명하지 않은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새벽빛이 창가에 드리울 즈음에, 나는 노마와의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어느 날 저녁. 노을이 금빛으로 물드던 때에 우리는 강변에 앉아 있었다. 노마가 병원에서 좋지 않은 소식을 듣고 온 날이었다. 나는 눈치 없이 무섭지 않으냐고 물었다. 노마는 웃으며 대답했다. 무서워. 그 말에 내가 또 눈치 없이 말했었다. 근데 어떻게 웃고 있어. 그러자 노마는, 그날 유독 하얗게 보였던 손으로 턱을 괴며, 어쩌겠어, 하고 그렇게 말했다.

   -지구의 절반은 밝고, 절반은 어둡대. 그러면 한평생 밝은 부분만 얘기해도 시간이 모자라잖아. 그러니까 앞으로, 필요하게 어두운 얘기는 안 하게.

   병원 나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노마가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그 옅은 미소를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고 있었을 터였다. 그걸 맨 마지막에 떠올린 자신이, 무척이나 미웠다.


   다음날, 나는 아저씨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아저씨는 멋들어지게 문장을 만들어 대리석을 잘 다루는 이웃에게 부탁하셨다. 얼마 후, 잘 정돈된 무덤의 앞에 조용히 비석이 놓였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노마에게 절을 올렸다. 두 번째로 고개를 숙였을 때 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뭐가 무섭고 두려워서, 여태 여기에 오지 못했을까. 엎드린 채로, 나는 눈물이 서린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오래도록 고개를 들지 못했다. 노마의 말마따나, 너무나도 맑은 햇빛이 이 산 전체에 드리워 있었다. 마치 내 안에 있는 어둠도 물리쳐주려고 하려는 듯이.

   그날 밤 나는 돌아오는 기차에서 잠에 들어버렸다. 꿈에서 나는, 곤히 누운 노마의 머리를 무릎에 벤 후 조용히 말했다. 나는 여기에 있어. 노마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자고 있었다.








  지구가 자전을 이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요새 아빠가 낚시 모임을 가신다고 집에 도통 안 들어오셨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보면서, 혹시 낚시 핑계를 대고 다른 집에 살림을 차린 건 아닐까 의심하셨다. 나는 아빠가 들어가 있다는 낚시 모임 단톡방에 이름, 성별, 생년월일 위장해서 들어갔다.

   이상인40.

   어제까지 나는 17살 여고생이었지만, 이 단톡방에서는 딸이 두 명 있는 40살 아저씨였다. 아빠가 보냈던 카톡을 참고해서, 나는 겨우겨우 아저씨처럼 인사를 했다. 물결표와 쉼표는 변신의 기본이었다. 첫날은 겨우 넘겼다.

   오랜만에 들어왔다는 김현수28 아저씨가 카톡을 남겼다.

   -형님, 지구가 자전을 이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고 읽고 있으니,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 말이 무의식에 박혀 있었나 보다. 다음날 아침에 지각을 하 선생님한테 혼나다가 그 말이 그대로 입으로 나와버렸다.

   "너 왜 늦었어?"

   "그, 지구가 자전을....... 이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날은 평소에 혼날 것을 2배로 혼났다. 교실로 돌아오면서 휴대폰을 켜보니 그 김현수28 아저씨도 혼나고 있었다. 아저씨의 카톡을 받은 안준형42 아저씨가 이렇게 카톡을 남긴 것이었다.

   -지구탓하지마라 지구는 잘못 없다

   나는 나도 같이 꾸지람을 듣는 기분이었다안준형 아저씨는 다름 아닌 우리 아빠였다.








  진로는 술 이름이야


   "모르겠어.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은 정말로 내가 원하는 길일까? 그냥 무턱대고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뒤로 물러서진 않았잖아. 도망가지도 않았고. 그럼 일단 멋진 거랬어."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지금 부끄러워야, 나중에 안 부끄럽게 살 수 있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 사람은 지금 나를 무척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내가 저지른 실수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은 여기를 나가야지. 그렇게 마음먹었다.

 

   선생님이 그 일기를 읽고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덧붙이셨다. 검은색 볼펜으로 쓴 정갈한 글씨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라는 서두를 보면서 그런 확신이 들었어요. 당신이 본인이 다니는 직장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거...... 아니라고요? 제 확신은 확신일 뿐, 진실은 아니었나 봐요. ㅎㅎㅎ

   타인이 아무 생각 없이, 반대로 서툰 선의로 던졌을 수도 있는 말에 대해, 그 속내를 추측하려 들면 많이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사람은 언제나 정확한 말을 할 수 있는 생물은 아니니까. 나도 그렇고 :)








  전설은 지금도 우리 곁에 있어


    <슈가슈가룬> 30분 요약을 어쩌다 보니 유튜브로 보고 있었다.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었는데도 푹 빠져서 한참을 보고 있었다. 레전드라는 댓글이 무척 어울리는 작품들이 그때는 참 많이 나왔던 것 같다.

    하지만 어릴 적에 텔레비전 앞에 앉아, 언제 아빠가 야구를 트실까 조마조마해하던 그걸 전설이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냥 재밌다고 생각하며 푹 빠져서 봤을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때는 그 작품들을 전설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로 어제 같았던 2005년이 머나먼 과거가 되고, 세월의 풍파를 맞고도 빛이 바래지 않는 작품들이 남았다. 그런 작품들에 레전드라는 칭호가 붙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주위에는 얼마나 많은 전설이 숨을 쉬고 있을까그것들을 재밌게 본 지금의 경험을 더욱 소중히 생각하는 일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휴식학개론 중간고사(4/21) 공지


   "저희가 이제 중간고사 시험 방식을 정해야 돼요. 우리가 한 학기 동안, 어떻게 하면 잘 쉴 수 있는가에 대해 공부를 해 왔잖아요? 그러니까 중간고사는, 별 다른 시험은 없어요. 다만 그날, 4월 21일에 자기가 얼마나 잘 쉬었는지를 리포트로 써서 제출하면 됩니다. 분량은 자유예요.

   단, 너무 잘 쉬어서 리포트를 까먹었습니다, 같은 변명을 하면, 저도 여러분의 성적 채점을 쉬어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이전 수업까지 누누이 얘기했죠? 단순히 집에서 나뒹군다고 휴식이 되는 게 아니에요. 휴식은 본인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해요. 여행이 필요하면 여행을 하고, 영화가 필요하면 영화를 보는 거. 자기 몸과 정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귀를 기울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아셨죠?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칠게요."






  곡우穀雨


   비가 몹시 내리던 어느 밤이었다. 배수 기능이 잘 작동하지 않았던 것인지, 세상이 약 2cm 정도 물에 잠겨버렸다. 그냥 걸어 다니면 신발이 젖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맨발로 다니기에 아스팔트 바닥은 무척 위험해 보였다. 그녀는 고민 끝에 구두를 한쪽만 벗기로 했다. 어느 집의 바퀴 달린 의자가 그녀의 집으로 떠밀려 온 참이었다. 신발을 신은 쪽의 다리를 의자에 올리고, 킥보드를 타듯 밖으로 나아갔다.

   내리막길을 주욱 내려가다가 어느 잔디광장에 도착했다. 구획이 나눠진 논처럼, 가로세로로 대리석 길이 깔린 정갈한 광장이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가로등 불빛 아래로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광장 정중앙에서. 플리츠스커트의 밑자락이 빗물에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물살을 가르며 정중앙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누군가를 애도하고 있는 이의 옆에다가 바퀴 달린 의자를 멈춰 세우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나를 위해서도 애도해 줄 수 있어? 그러나 상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을 위한 애도라고 생각하고 만족하기로 했다. 긴 시간이 지나 기도하던 이가 고개를 돌렸을 때거기에는 바퀴 달린 의자만이 남아 있었다. 세상은 아직 물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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