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대학교에 있다 보면 발표 시간에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발표자가 서두에 내뱉는 '제가 시간이 없어서'라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시간이 없어서 6월 글이 이제야 모였습니다. 이 한 달은 무언가 많은 한 달이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사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없다는 사실을. 그 시간을 유용하게 쓸 줄 아는 사람만이, 그런 말을 안 하고 당당하게 발표를 만드는 멋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시간이 없다는 변명은 정말 말이 안 되는 핑계이므로, 차라리 '제가 감기에 걸려서'라고 변명하는 게 나을 지경입니다. 이제라도 감기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감기에 걸려도 글은 쓸 수 있잖아요? 그러므로 이 자리를 빌려 자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는 '죄송하다고 말하면 넘어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부끄러운 척 일단 악어의 눈물을 흘리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죄송합니다, 라는 말은 생각보다 습관이 되기 쉬운 말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죄송하다는 말이 너무 많다 보면 사람은 쉽게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압니다. 그러므로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하지 않습니다. 어?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사실 사과를 하지 않는 사람은.. (7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확실한 사랑을 위한 모험
나는 확실한 사랑을 찾아 떠나겠어, 라고 이야기하며 조세프 반도르는 기나긴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여행길에 오르면서 여러 사람과 만났으나, 그중 누구에게도 확실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노인이 된 조세프가 홀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깨달았다. 이 세상에 확실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랑은 물론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불확실성을 끌어안은 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그 불확실성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든 눈앞의 사랑이 깨질까 봐 두려워했다. 단지 그것이 두려웠음에도, 그 두려움을 '확실하지 않다'는 말로 이쁘게 포장하려 했고, 결국 그는 혼자가 되었다. 두려움을 외면한 대가는 컸다.
계약갱신청구권 발동!
월세 계약서를 사이에 두고 집주인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계약서를 몇십 분 동안 바라보고 있던 탓이었다. 전날에 재계약과 관련해서 여러 법 조항을 찾아본 탓인지, 계약서에 적힌 내용에 잘못된 부분이 많아 보였다. 가장 문제가 되어 보이는 부분은 인상된 월세였다. 집주인은 사정이 안 좋으니 기존 40만 원에서 10만 원을 더 받겠다고 했다.
지금 사는 곳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집주인은 항상 불만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었으나, 살고 있는 중에는 개입을 별로 안 하는 사람이었다. 제가 좀 신중한 사람이어서요, 나는 집주인 앞에서 겨우 웃어 보였다. 다만 나는 찝찝해하고 있었다. 어제 알아낸 사실로, 재계약을 할 경우 세입자는 '계약갱신청구권'을 1회에 한해 주장할 수 있으며, 이 경우 기존의 계약 조건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집주인은 본래 보증금의 5%까지만 인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집주인이 더 받을 수 있는 돈은 40만 원의 5%인 2만 원뿐이었다.
나는 무엇에 겁을 먹고 있을까. 그냥 내가 '계약갱신청구권을 주장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끝나는 일이다. 이것을 주장하지 않고 앞으로 2년을 더 산다면, 나는 매달 적어도 8만 원의 손해를 보는 셈이다. 8만 원. 그 정도는 이 근방에서 싼 거예요. 집주인은 얘기했으나, 매달 8만 원씩 2년이면 거의 200만 원이다. 나가지 않아도 될 돈 200만 원이 나가는 셈이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싫은 소리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서 나 대신 싫은 소리를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나 보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거 뭐 어려운 거라고. 집주인이 혼잣말을 하듯 얘기했다. 나는 저만치 있던 큰 거울을 보았고, 그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나와 맞닥뜨렸다. 그 순간 옛날에 했던 전세 계약을 떠올렸다. 그때 집주인 분은 정말 좋은 분이었다. 그분은 계약할 때 롤케이크를 들고 오셨다. 나는 괜히 기가 죽어서, 롤케이크를 하나도 먹지 못하고,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면서, 제가 좀 예민해서요, 하고 괜한 인사치레를 이었다.
그때 주인 분이 얘기하시지 않았던가.
-그건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에요. 꼼꼼하고 신중하게 하는 건 당연하게 해야 되는 일이에요.
나는 그 당시 그 꾸짖음보다도, 나를 안쓰럽게 보던 그 눈빛을 인상적으로 느꼈었다. 계약이 끝나고 나는 새로 얻은 전셋집에 홀로 남아 롤케이크를 와구와구 먹으면서 뭔가 비참한 기분을 느꼈었다. 자신이 무척 바보같이 느껴졌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싫은 소리를 못하는 바보였다.
그래. 말하는 거다. 말하지 않으면 나는 자기 전에 누울 때마다 이번 달에 나갈 돈에 대해 후회하느라 화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자신이 쩨쩨하게 군다고 생각하지 말자. 배려를 할 거면 확실히 하고, 권리를 주장할 거면 확실히 하자. 나는 생전 처음으로 싫은 소리를 해보기로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계약갱신청구권, 발도오오오옹!"
교내 무차별 영화 스포 사건
영화나 만화의 내용을 스포일러 할 경우,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문화콘텐츠스포죄'가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한 스포일러 사건의 1심이 진행되는 날이었다.
"재판장님. 피고인은 지난 5월 10일 오후 1시 10분경 수업 시간에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몇몇으로부터 '하교 후 영화 <피서>를 보러 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 예고편 봤는데, 그거 처음에 등장하는 상어가 주인공을 물어뜯었을 거 같아.'라고 우회적으로 영화의 결말을 누설하였습니다. 교실에 있었던 피해자들은 나중에 영화 내용이 피고인이 언급한 내용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의 병을 얻어 현재 병원에 입원 중에 있습니다. 이에 검사는 피고인에 대해 형법 제1040조 제1항 문화콘텐츠스포죄로 공소를 제기하였습니다."
"예. 피고인은 공소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절대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영화 <피서>를 본 적이 없고, 그저 수업 시간에 제 추측을 말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스포죄는, '그거 상어가 사건 범인이다.'라고 명시적으로 이야기해야 성립하는 거 아닙니까? 저는 죄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변호인도 의견을 말씀하시겠습니까?"
"예. 피고인은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에 의하여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오늘 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피고인도 이야기했듯, 현재 문화콘텐츠스포죄는 드라마, 영화와 같은 문화콘텐츠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전달한 자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은 직접적으로 보지 않고 추측만 하였기에 피고인은 무죄입니다."
"음, 피고인은 이 사건의 범행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검사는 공소사실에 대한 입증계획을 밝히시고 증거를 신청하십시오."
"예. 검사는 피고인의 범행이 형법 제1040조 제1항, 즉 '특정 문화콘텐츠의 주요 내용을 아는 자가 그것을 모르는 자의 동의 없이 내용을 전달했을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항목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당일 피해자 학생들에 의해 녹음된 수업 녹음 파일을 증거로 신청합니다."
"피고인 측은 검사가 신청한 증거에 대해 의견 있으십니까?"
"별다른 의견 없습니다."
이전에 피고인이 수업 중에 학생들의 녹음을 허용했기 때문에, 증거 채택 과정에서 문제는 없었다. 그로부터 녹음 파일과 함께 몇 가지 추가적인 증거가 제출되었다. 그중에서 결정적인 증거로, 피고인이 영화 <피서>의 나무위키 항목을 보았다는 검색 기록이 있었다. 피고인은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시간이 지나, 피고인 신문을 위해 검사가 이야기했다.
"녹음 파일을 들어서 아시겠지만, 피고인은 피해자들에게 영화 <피서>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추리를 해나가는 척, '처음에 등장하는 상어가 실은 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주요 내용을 스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피서>에서는 처음에는 마스코트처럼 등장했던 상어가 최후반에 주인공을 물어뜯은 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영화 내에서 등장인물들의 추리 과정은 피고인이 수업 시간에 이야기한 범인 추측 과정과 거의 동일합니다. 피고인은 정말로 영화를 보지 않으셨습니까?"
"예. 정말로 본 적이 없습니다."
"피해자들에게는 어떤 이유로 '상어가 범인이다'라는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저는 예고편만 보고도 이 영화의 줄거리가 무척 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시간 낭비하지 않고 공부에 집중했으면 하는 생각으로, 그저 제 생각을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피해자는 예고편을 보고 말씀했다고 하셨는데, 녹음 파일 내용을 보시면 주인공이 상어에게 붙여 준 루카라는 이름도 같이 언급하고 계십니다. 이는 예고편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증거로 제시된 것처럼, 예고편만 본 것은 아닙니다. 나무위키의 내용도 일부 봤습니다. 이전부터 무슨 내용일지는 조금 궁금해서요."
"흠. 이상입니다."
"변호인, 신문하십시오."
"피고인은 피해자들에게 영화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피고인은 나무위키를 통해 영화에 대한 내용을 접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피고인은 잠시 대답을 멈추고 변호인을 보았다. 그러나 변호인은 여전히 두 손가락을 꼬고 있었다. 그것은 '예'로 대답해도 좋다는 일종의 싸인이었다.
"예. 맞습니다. 하지만 나무위키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보지는 않았습니다."
법정이 술렁였다. 변호사가 피고인이 영화의 내용을 스포했다는 크나큰 죄를 순순히 자백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나오는 술렁임이었다. 그러나 변호인은 패배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변호인은 최종의견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피고인이 나무위키에서 영화 <피서>의 내용을 봤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쟁점은 피고인의 행동이 법에 저촉되는지의 여부입니다. 현행법 상 스포일러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문화 매체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을 경우입니다. 피고인이 영화의 내용을 스스로 추측하든 아니면 이미 나무위키로 보았든 그것을 피해자에게 이야기한 것은 단순히 '의견 제시'였을 뿐입니다. 검사 측에서는 피고인이 해당 문화콘텐츠의 주요 내용을 특정 의도를 가지고 피해자들에게 알렸다는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재판장님,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학생 중 한 명이 탄식했다. 스포가 법적으로 금지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의 내용이 점차 은밀한 방식으로 스포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사례는, 기껏해야 자동차에 '절름발이가 범인이다'라고 영화 스포를 써붙이고 영화관 주변을 맴돌던 90년대의 사례가 마지막인 듯했다. 한동안 방청석이 술렁였다. 아직 <피서>를 보지 않은 방청석 사람들 또한 법원에서 나눠준 스포방지 헤드셋을 빼고 그 술렁임에 가담했다. 피고인은 가만히 숨을 죽였다.
파워타임
오 년 넘게 주말 라디오를 맡고 있던 DJ는 오늘도 비슷한 사연을 받았다.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자신이 모질게 대했던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 괴롭다는 이야기였다. 오 년 전 라디오를 처음 시작했던 때에도 그런 사연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사연은 잊을 만한 때가 되면 이름과 나이만 조금씩 바뀌어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아니 살아생전에 잘하든가! 맨날 돌아가시면 미안하대! 라고 어느 날 문득 동료 PD와의 술자리에서 그는 그렇게 언성을 높여버렸다. 은연중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일까. 매년 같은 사연을 읽으며, 여러분도 오늘, 집에 계신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라고 권했는데도 아직도 이런 사연이 있다는 사실에.
그러나 매번 그렇게 남의 가족에게 사랑을 권유하던 자신은, 정작 본가에 계시는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했던가. 그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라, 높아졌던 언성이 급격히 낮아졌다. '미안하대'에서 '하대'가 잘리고 '미안'이라는 얄팍한 사과만이 가게에 크게 울렸다. 바빠서 그랬어요. 바빠서.
아니, 바쁨 탓이 아니다. 내 탓이지 않은가. 나는 누구 탓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사랑이 쑥스럽든 부끄럽든 나는 그걸 한 번쯤은 전했어야만 했다. 에휴, 동료 PD가 숟가락으로 그의 머리를 치며 비꼬듯 말했다. 오늘, 집에 계신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망종芒種
힘들어서 더 이상은 걸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밭 한가운데에 주저앉아버렸다. 추수가 끝난 보리밭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더운 날에, 하필 우리는 왜 도망치기로 결심했을까. 그나마 위안인 것은, 이미 해가 져서 뙤약볕 아래를 걷지는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눈치 없이 달려드는 모기 몇 마리를 손으로 잡으며 둘은 잠시 쉬기로 했다.
아빠 이거 봐요! 자신처럼 한참 굶었을 소년이 밭 한 귀퉁이를 보며 외쳤다.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걸어가니 베지 않은 보리가 몇 개인가 남아 있었다. 풋보리였다. 둘은 보리밭주인이 오기 전에 그 풋보리라도 입에 넣고자 했다. 아빠라 불린 사람이 갖고 있던 라이터를 켜서 풋보리를 그을렸다. 부스럭, 부스럭. 검게 그을린 풋보리를 두 손으로 비비며 두 사람은 이따금 피어오르는 탄내에 기침을 했다.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보는 사이였다. 한 명은 이혼을 한 중년 남성이었고, 한 명은 가출 청소년이었다. SNS에서 가족을 구하다가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끝에 직접 만나기로 했다. 이른 아침에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나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계속 이동했다. 인스타에서 본 프로필 사진이랑 실제 인물이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었다. 필터의 힘은 대단하네요, 둘은 어울리지 않는 사진을 서로 놀리면서 나름 시간을 때웠다. 서로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아빠, 아들이라는 호칭을 써보기도 했다. 그 외에 다른 호칭이 떠오르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놓인 상황으로 인해, 밤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상상을 자주 하곤 했다. 그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을 바에야 직접 벼랑 끝에 서기로 결심했다. 꼭 죽기로 결심했다고 해석하기는 애매했다. 그냥 자신이 벼랑 끝에 내몰리기를 누군가가 바라는 것만 같아, 그래, 그럼 내몰려줄게, 하고 승낙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짐이라고는 편도로 가는 버스표 하나만 챙기고, 집도 몇 채 없는 휑한 논밭에 내렸으리라. 배가 고파 죽는 것이 가장 괴로운 죽음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채.
다행히 들판에 기적처럼 남아 있던 풋보리 몇 개를 그을려 먹은 탓에 배고픔이 조금은 달래졌다. 배고픔을 달래자 재로 검게 더럽혀진 두 손이 눈에 보였다. 두 사람은 어느새 자신들의 손이 더러워진 것이 슬프고 짜증이 나서, 참았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조용했던 논밭에서 두 사람은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들은 옷에 재가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면서. 그것이 풋보리를 태울 때 나온 연기를 들이마신 탓이라고 겨우 둘러대면서.
무료 나눔 바구니에 있던 고소장
팀장님은 성격은 좀 모나셨지만 기묘한 이야기를 자주 하시는 분이셨다. 어느 날엔가 팀장님은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겪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셨다.
"그 회사 1층에 무료 나눔 바구니가 놓여 있었는데, 보통 거기에는 유용한 물건이라고는 놓인 적도 없고, 페트병 뚜껑이나 다 쓴 볼펜처럼, 누가 봐도 쓰레기인 것들만 놓여 있었단 말이야.
근데 어느 날 그 바구니에 고소장이 놓여 있었던 거야. 제목에 쓰인 고, 소, 장이라는 세 글자가 너무나도 선명해서 나는 누굴 고소해 본 적이 없는데도, 그게 실제 고소할 때 쓰는 문서인 줄 바로 알았다니까. 도대체 누가 놓고 갔는지. 주변을 둘러봐도 범인을 알 수가 없었는데. 무서운 건, 마치 홀린 듯이 내가 그 고소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는 사실이야.
데스노트를 발견한 사람의 기분도 이랬을까? 물론 여기에 이름을 쓴다고 바로 사람이 죽는 건 아니잖아. 다만 나는 불현듯 내 안에, 지금껏 평화롭게 지내왔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 안에, 누군가를 향한 증오가 깃들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어. 그게 무척 기분이 나빠져서, 그래서 나는 주머니에 있던 볼펜을 꺼내, 고소인 란에 '놓고 간 사람'이라고 쓰고, 피고소인에는 내 이름을 써서 다시 무료 나눔 바구니에 돌려두었지.
근데 무서운 건, 고소인이 피해자고, 피고소인이 가해자인데 내가 그걸 반대로 썼다는 사실이야. 그날 내가 놔둔 고소장은 나를 향한 누군가의 고소장으로 탈바꿈된 셈이었지. 그걸 내가 알아챈 것은, 다음날 부장님으로부터, '혹시 뭐 미움 사거나 그랬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였어. 정말 무섭지 않니? 난 그날 고소를 무료로 나눔 받았던 거야."
자업자득이잖아요, 목 끝까지 말이 차올랐지만 나는 겨우 참았다.
하지夏至
너는 좀 재미없어.
이별의 이유란 정말 하찮은 것이었다. 왜 헤어지자는 건지, 그 이유도 묻지 못한 채 고개만 숙이는 나를 앞에 두고 남친은 자기 할 말만 했다. 재미없다. 그게 이유였다. 내가 무슨 네 광대야? 그렇게 화낼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화를 별로 내지 않는 나의 끓는점에 그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도달하지 않고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오늘 아침 예상했던 문구들, 예를 들면 '우린 사랑해서 헤어지는 거야'라든지, '내가 준 선물 다 돌려줘'라든지 하는 문구가 나왔다면 나는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문구가 나오면 화를 내기로 결심했으니까.
그러나 참 기묘하게도 그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그러나 무의식 중에 내가 인지하고 있었을 콤플렉스를 건드렸고, 나는 덕분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리는 어째선지 학교 모래밭 위에 서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일 때문에 돌아가야 한다고,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핑계를 대고 저만치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자판기를 발견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자판기를 발견하고 부리나케 지갑을 열었으나, 현금이 없어서 목말라 죽는 꿈이었다. 잠에서 깬 곳은 초등학교 벤치였다. 옆에서 수위 아저씨가 얼굴을 찡그리며 서 있었고, 나는 계속 울리는 휴대폰 화면을 보고, 모르는 전화번호임을 신경 쓰지 못한 채 그대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저편에서 누군가가 울음을 참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누구누구가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장례식장의 위치를 알려줄 테니 꼭 오라고 이야기했다. 전화 잘못 거셨는데요, 라는 말을 선뜻하지 못했다.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내가 내뱉는 모든 말들이 재미없게 느껴졌다. 관객 중 누군가가 야유를 보내는 것을 눈치챈 소심한 코미디언처럼, 자신감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의 말에 단호하게 거절도 못하고, 네, 네, 하고 어떻게 돌아가시게 되었는지까지 들어버렸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덧붙였다. 나 안 울어, 나 부모님 돌아가실 때도 안 울었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계속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먼 길을 돌아왔다. 나는 스스로 멀쩡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무덤덤하게,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떨어진 식재료를 좀 사고, 빵집에서 빵도 몇 개 사고, 마감 기한이 아직 남은 과제들을 몇 개인가 미리 끝내놓고, 잘 시간이 되어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이상했다. 눈앞이 이상하리만치 밝았다. 정신이 멀쩡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창밖에서 아직도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미 잘 시간 아닌가? 손목시계는 1시로 찍혀 있었다. 오전 1시인지, 오후 1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보다 시계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축축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땀에 젖은 블라우스를 벗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찝찝했다. 나는 블라우스를 벗고 샤워를 했다. 그래도 밤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번주는 장마라고 했는데, 비도 오지 않았다. 하늘이 기분 나쁠 정도로 맑았다.
머리를 자르고 싶었다. 긴 머리가 어깨까지 닿았다. 실연당한 사람들이 머리를 자르고 싶어지는 이유가 이런 거겠지, 싶었다. 그냥 밀어버리고 싶었다. 전부 다. 겨울에 헤어지는 사람들도 이런 찝찝함을 느낄지는 모르겠다. 누군가 통계 자료를 내줬으면 좋겠다. 계절별로 실연하는 커플을 대상으로 한 미용실 이용 빈도 증가 여부 같은 거. 다음 과제 주제로 하는 건 어떨까? 하, 하. 재미없다.
부고 문자가 휴대폰으로 날아왔다. 이름 모르는 중년 아저씨가 돌아가셨다. 어쩌다가 나에게 전화가 왔을까. 어쩌면 내가 모르는 먼 친척의 죽음일지도 몰랐다. 가족에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무언가 언어를 만들어내는 게 무척 하찮은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 안쪽에 안 좋은 무언가가 계속 쌓여가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와 반대로 울음을 참고 있던 상주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왜 그 상황에서도 그 사람은 울지 않고 있었을까. 그래도 가기로 했으니까, 밤이 되면 가봐야지, 밤이 되면......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마지막으로 들렸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내 시계가 이상한 것 같아...... 시간이 안 가...... 시계가 계속 그 자리야......
나는 밖으로 나섰다. 밖은 여전히 더웠다. 시계는 이제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전히 밤은 찾아오지 않았다. 지구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확실히 가고 있었다. 진짜로? 시간은 확실히 가고 있는 거 맞아? 지금까지 봐온 시간들은 손목시계로 잠깐 본 시간이었잖아. 내가 시계를 볼 때마다, 정지된 시간이 무작위로 표시되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
이런저런 상상을 미용실 의자에 앉을 때까지 이어나갔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나는 그때도 정지된 시간을 떠올리다가, 이내 대충 잘라달라고 이야기했다. 싹둑, 싹둑,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뒤에서 미용실 사장님의 두 아들이 틈날 때마다 울어댔다. 아이들은 사탕이 먹고 싶다는 이유로 미용실이 떠나가게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은 자신이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울음으로 그것을 표현한다고 했다. 커트는 오래 걸렸다. 오래 듣고 있기에 귀가 아플 정도로 아이들은 신나게 울어댔다. 커튼, 커튼 좀 쳐주세요. 그러나 내 목소리가 작았나 보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내 요청이 묻혔다. 나는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아이가 우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단지 저렇게 울어도 괜찮은 나이대가 부러웠다. 마음껏 울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로, 돌아가고 싶은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러운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 내 나이는, 마음껏 울면 이상한 나이인가. 사실 마음껏 울어도 되는 나이였던 것은 아닐까.
머리는 그지같이 잘렸다. 나는 적지 않은 돈을 내고 밖을 돌아다녔다. 그다음 손목시계를 봤을 때 시계는 또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휴대폰을 켜자 마찬가지로 4시였다. 휴대폰이 꺼지자 검은 화면에, 그지같이 잘린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감정을 느껴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대로 씻겨나가지 못한 머리카락이 뒷덜미를 찌르며 나를 괴롭혔다. 방금 샤워했는데, 옷이 또 땀으로 젖기 시작했다. 아직도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괴로웠다. 사람 많은 길로 들어서자 이런저런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코인노래방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다, 노래방은 옆방에서 뭘 하는지 들리잖아. 집으로 돌아갈까, 집은 방음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해. 어디로 가야 좀 태양을 피할 수 있을까. 내가 무슨 가수 비도 아니고. 하, 하. 재미없어. 다 재미없어. 다 재미없으니까 제발, 기우제라도 할 테니까 제발, 누가 나 좀.
나는 어느새 장례식장으로 향해 있었다. 거기에 찾아가기까지의 기억은 없었다. 나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영정에 두 번 절을 하고, 아직 울음을 참고 있는 상주의, 어디서 오셨냐는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울음을 터뜨렸다. 아아악, 흐윽, 허으윽...... 숨이 넘어갈 정도로 쏟아지는 서러운 통곡에 덩달아 상주도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렸다. 한동안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서로를 부둥켜 울었다. 재미없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울고 난 뒤에야, 하늘은 어둑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