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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미루 Mar 13. 2024

TAR 타르, 권력과 부패의 춤

영화 리뷰


1줄 요약 : 레즈비언 여성 지휘자가 성범죄 가해자로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리디아 타르는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무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라는 성공을 거머쥔 인물로 등장한다. 그녀는 권력, 야망과 더불어 독재자를 연상시킬 정도의 독선적인 성격을 가졌다. 리디아 이전 세대부터 오케스트라에서 일했던 세바스찬이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가차없이 해고를 결정하니 말 다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그녀가 어떻게 권력을 휘두르는지를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리디아는 교묘하게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을 미리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관례와 다른 행실을 보여도 그들이 따르도록 군림한다. 그녀의 입은 다정하게 웃고 있고,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오케스트라의 모두는 알고 있다. 연주를 시작하면 격정적으로 흔들리는 리디아의 금발은 마치 사자의 갈기 같고, 젠틀한 껍질을 까보면 공포가 있음을.


리디아는 성공과 젠틀함을 모두 갖춘 매력적인 레즈비언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언제나 정갈하게 준정장의 복장을 갖추고 꼿꼿하게 걷는 리디아를 보면 어떤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클래식 업계의 성 편견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본인은 불만이 없다거나, 여성 음악인 아카데미의 지원자를 여성으로 제한하는 관습을 바꾸자는 등의 말이 그 원인이다. 여성 캐릭터에 이러니 저러니 기준을 다는 게 얼마나 성차별적이고 좁은 인식인지 알면서도 리디아가 진절머리 나는 까닭은 아마 우리가 드물지 않게 이런 여성들을 마주치기 때문이 아닐까. 여성에 대한 책을 읽으며 어떤 여성들은 마음 깊이 동하며 울고, 또 다른 여성들은 그 책을 지나친 픽션과 선동으로 폄하한다. 세상에는 너무 다양한 사람과 삶의 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이 부당함을 생애 한 번도 겪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기쁜 일이다. 모두가 똑같은 불행을 겪었다는 말보다 훨씬 희망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개인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하여 세상에 실제로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이 당연한 사실을 잊곤 한다.


이야기는 리디아의 커리어의 정점으로 시작해서 조금씩 저물기 시작한다. 그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는 시간을 통제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연주를 시작한 뒤 실제로 몇 분, 몇 시간이 지났는지 알고 있지만 연주자들은 자신이 통제한 시간만을 인지한다고. 그러나 무너지는 리디아의 왕국에서 시간은 점점 통제를 벗어난다. 그녀가 처음 메트로놈 소리에 깨어났던 날, 리디아는 다음날 페트라에게 서재에는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된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작업실에는 이웃이 찾아와 일을 방해하고,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던 악보는 사라진다. 강연 차 나갔던 줄리어드에서의 언행이 악의적으로 편집되어 소셜미디어를 돌아다니고, 유망한 여성 지휘자의 죽음이 리디아 때문이라는 인터뷰가 나오는 등 리디아의 현실이 저물수록 그녀는 시간을 통제하지 못한다. 여기서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캔슬컬쳐가 서서히 등장한다.


리디아는 극의 초반, 줄리어드에서 맥스와의 대화에서부터 캔슬 컬쳐(*유명인이나 공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논쟁이 될 만한 행동이나 발언을 했을 때 팔로우를 취소하고 외면하는 행동방식)에 대한 직접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맥스는 팬젠더로서 여성혐오적인 삶을 살았던 바흐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리디아는 이를 지나치게 비난한다. 그녀는 완벽한 곡의 재현을 위해서는 작곡가와의 교감이 중요하고, 작곡가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음악적인 세계를 더 넓혀주리라 믿는다. 가장 성공한 음악가 중 한 명으로서 리디아의 주장은 거칠지만 타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이 장면에서 강의실을 뛰쳐 나간 건 맥스였지만 2시간 반의 러닝타임을 다 거치면 우리는 알게 된다. 도덕성은 중요하지 않다는 예술가를 품어줄 시대는 이제 끝났다는 것을. 말러의 5번 교향곡을 녹음하던 리디아는 성매매 마사지샵에서 5번 여성을 고르는 신세가 된다. 권력을 통해 수많은 여성의 몸과 마음을 사들일 때나 진짜 성매매 업소에서 여성을 사는 것이나 결과는 똑같지만 리디아는 구토를 한다. 죄의 민낯은 이토록 역하다.


업계 사람들, 오케스트라 단원들, 그녀의 스승, 레즈비언 파트너 등 리디아와 권력과 거짓으로 엮였던 관계들은 모두 그녀로부터 등을 돌린다. 리디아가 어리고 유망한 여성들을 현혹하며 죄를 지을 때마다 침묵했던 샤론은 그제야 말한다. 당신과 거래하지 않았던 사람은 오직 당신의 딸(페트라) 뿐이라고. 샤론의 대사를 통해 우리는 리디아의 아주 먼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리게 된다. 벌거벗은 몸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던 늙은 이웃과 리디아의 미래는 다르지 않다. 이웃집의 그녀도 베를린에서 리디아의 작업실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점이나 사후에 찾아오는 자식들의 행색을 보면 결코 가난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웃에게 남은 건 정신이 온전치 못한 딸 하나 뿐이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앞에서 리디아는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성을 낸다. 어쩌면 그녀 자신도 자신의 미래를 직감했던 건 아니었을까. 타르의 몰락은 사실 극 초반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극의 시작과 함께 진행된 인터뷰에서 리디아는 장 바티스트 릴리의 일화를 들며, "커다랗고 뾰족한 막대를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바닥에 내리치며 템포를 맞추는 거죠. 연주자들이 별로 좋아했을 것 같진 않아요. 아무튼 그런 행위는 릴리가 공연 중에 실수로 자기 발을 막대로 찌르고 죽게 된 후 끝이 납니다."라는 대사를 한다. 대중들은 이를 농담으로 듣고 폭소하는데, 그 모습은 이 영화의 마지막을 보는 나와 닮아 있다.


성공적인 여성 지휘자인 '마린 알솝'과 더불어 일부 관객들은 이 영화가 '반여성적'이고 '여성 지휘자가 주인공이 된 기회를 성범죄 가해자'로 만든 데 유감을 표했다. 그러나 나는 이에 해명으로 내놓은 케이트 블란쳇의 말을 좋아한다. "권력은 부패의 본질이다." 대중들은 나쁜 소식이 흔히 노출될수록 무뎌지는 것 같다. 마약이나 음주운전 등 범죄를 저지른 남성배우들이 스크린에 복귀하면, '그 사람만 그런 것도 아닌데. 연기는 끝내주잖아.'하며 쉬쉬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남성 배우와 함께 마약을 했던 여성 가수는 아직도 미디어에 나오지 않고, 나도 존경해 마지 않는 남성 대배우의 음주운전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같은 죄를 지은 여성 배우는 1년 7개월만에 sns 사진을 올렸다고 대중과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나쁜 일에 일일이 반응하는 건 사실 피로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모든 분노를 나를 연소시키며 타오르기 때문이다. 더불어 내가 분노하는 소식이라고 해서, 대중들에게 같은 분노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건 피곤한 사람으로 비춰지기 십상이다. 그런 벽을 몇 번 느끼고 나면 그럼 똑같이 여성의 죄도 쉬쉬하라는 질 나쁜 소리라도 퍼붓고 싶어진다.


그러나 죄의 성별은 없다. 케이트 블란쳇의 말처럼 타르는 그저 부패한 권력자일 뿐이다. 부패한 권력자가 특정 성별에서 더 많이 보인다면 그건 권력이 특정 성별에 더 많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지 성별이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하나, 부패를 예민하게 바라보는 눈과 목소리를 기르는 것 뿐이다. 눈과 귀가 바로 트인다면 우리는 언제고 이 영화와 같은 결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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