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만년에 왜 어머니가 약혼자를 가졌었는지,
왜 생애를 다시 꾸며 보려 했는지 알 수 있을 듯 했다.
그 곳,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주변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을 것이다.
-이방인 2부 5장
그런데 사실상 이방인을 두 번째로 읽고서 내 마음에 남은 것은
(이번에도 다른 이유로이긴 하나 당혹감을 여전히 감출 수 없었던) 첫문장은 아니었다.
만년에 왜 어머니가 약혼자를 가졌었는지
왜 생애를 다시 꾸며보려 했는지 알 수 있을 듯 했다.
그 곳,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주변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을 것이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서 어머니는 해방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생겼을 것임에 틀림없다.
어느 누구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첫 문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마지막 문장을 향해 가고 있는
그 몇 번째의 문장과 문장들.
그는 앞서 어머니를 가끔씩 스스로 떠올렸던 것처럼(*오늘 엄마가 죽었다 1)
그의 마지막에 다다라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제였다.
"맘" 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Mamam은 더더욱 아닌)
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오른편 책상 위 가만히 놓여 있는 나의 휴대폰을 들여다 보고 있다.
물론 무음 상태이니 나의 휴대폰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멈춰 있는 휴대폰을 보고 있는 나의 손가락, 심장, 동공은 이상을 일으킨다.
자율신경계가 반응을 보인다.
파블로의 개가 생각난다.
(누군간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이렇게 그 상황을 잠시 떠올리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오늘 지금,
마치 어제 오전의 그 시간으로 나를 다시 데려다 놓은 것 마냥 손가락이며 심장이며 동공에 반응이 인다)
나는 이번에도 통화 버튼을 그 주어진 얼마의 시간 동안 누르는 것에 실패하였다.
그렇다.
맘은 단어 그대로 엄마, 나의 엄마다.
방금 전 나는 웃기게도 어제의 상황에 대하여 길고 길게 늘여뜨려놓았지만 아주 간단하다.
"어제 오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므로.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그 어떤 이는 어림짐작하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나와 엄마의 관계는 무어라 단정짓기 어렵다. 그녀의 딸인 내가 40대가 된 2025년의 표면들에서는 지나간 시간들을 알기란 어렵다.
내가 언제부터 나의 휴대폰 속에 그녀를 맘이라 해두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거의 언제나 나만이 볼 수 있는 나의 소유물인 나의 휴대폰이지만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다해도) 그녀를 엄마라고 저장해 놓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웃기게도 맘이다.
이반 일리치(*톨스토이 -이반일리치의 죽음)가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던 것은 다름 아닌 그가 지나온 거의 모든 시간들이 진짜가 아닌 가짜였던 것이었다는 것을 나는 생각해본다.
그가 나를 본다면... 진짜와 마주하라고 할까?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그것에서 도망치지말고 가짜가 아니기 위해서 그게 뭐든간에 애를 써보라고 할까?
'가뿐하고 유쾌하고 점잖게 흘러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이제 그만두라고 그는 나에게 말해줄까?
치나스키(*찰스 부코스키 - 우체국)라면 어떨까?
그는 아마도 예상하건대 그가 만난 주요한 세 여자, 베티, 조이스, 페이와 별반 다를 것도 없이 그의 어머니를 취급(!) 하지 않았을까?
아니, 오히려 대부분 거짓으로 점철된 이반일리치의 삶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가짜의 시간은 단 일 초도 용납할 수 없는 치나스키 그의 말을 듣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데 그자 였다면 나와 같이 40대의 시간까지 오지도 않았을거니와 이미 10대의 그 어느 순간들, 20대의 그 날들, 30대의 그 때 그 순간 순간 그자의 속에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모두 밖으로 쏟아내 버렸을테지.
이를테면 그는
아침이 되자 아침이었고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아마 소설을 쓸 것 같군, 생각했다. 그래서 소설을 썼다.
-우체국 p.241
하는 식이고,
나의 말로 표현하자면 그는
'여자를' 따라 길을 걸었다 라고 말하지 않고 '여자의 엉덩이를' 따라 길을 걸었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껏 그만큼이나 저열하고 악의와 또 선의 또한 없는 태연하게 드러내는 말들, 어쩌면 고백 같은.
그런 것들을 그 이전엔 본 적이 없다.
만약 그가 나였다면?
내가 치나스키가 주인공인 소설 [우체국]을 마지막 장까지 펼치는 것을 멈추지 않게 해준 건 나의 어떤 욕구들, 그러니까 해방, 일탈, 탈출, 그런 마음으로 그를 계속 염탐했던 나였기에
그러니까 그가 아주 잠시라도 내가 된다면 그는 아마 지금 내가 바라지 마지 않는 어떤 욕구들, 그러니까 해방, 일탈, 탈출 그런 마음들을 대변하는 어떤 말들과 몸짓들을 했음이 분명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싶지만 이건 특히나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인 것을 분명히 알 것 같기에 지금은 일단 덮어두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나는 지금 당장 내 휴대폰을 집어 들어
맘 대신 엄마라고 다시 저장하지도 않을 거고
이반 일리치의 조언대로
나의 거짓을 드러내고 진짜를 마주할 용기를
지금 당장 갖지 못하며
치나스키 그치 처럼 부끄러운 삶을 드러내지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지금 나는
나의 엄마에 대해서
생각해보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