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여름을 걷는다.

by 홍진호 Hong Jinho

사실 나는 로맨스를 그다지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애니메이션이라면 더더욱.

그런 내가 며칠 전 일본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보고

마음 한 구석이 이렇게나 오래 아릴 줄은 몰랐다.

그 감정은 강렬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오히려 조용히, 물속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낮고 깊게 울린다.


인물들 사이의 감정은 말로 다 닿지 않는다.

서툰 말과 엇갈린 표정, 다가가지 못한 타이밍,

그리고 그 모든 걸 지켜보는 나.

그 시절의 나였고, 지금의 나이기도 한 나는

어쩔 수 없는 슬픔과 함께 그 찬란한 계절을 통과한다.


그 시절 우리는 참으로 무모했고,

그 무모함이 우리를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걸

지나서야 알게 된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던 감정들,

말하지 못한 마음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다만 한순간의 반짝임이었음을.

그 반짝임은 여름 햇살 같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닷바람 같고,

짧은 꿈처럼 아득하게 멀어진다.


나는 유독 여름에 감정이 무르익는다.

마치 짧은 여름밤의 꿈처럼,

한순간 뜨겁게 타오르고는 이내 사라져 버리는 열병 같은 사랑을 앓는다.


거창한 사건도, 대단한 서사도 없는 이야기.

하지만 조용히 마음의 문을 열고 들여다보게 만드는

그 따뜻한 울림.

마치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 읽듯,

아주 어릴 적 내 안에 있었던 순수한 무엇이,

조용히 깨어났다.


어쩌면 우리는 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한마디, 눈빛, 혹은 마음을.

그리고 그 기다림은 대체로 말없이 끝나지만,

그 침묵마저도 잊히지 않는다.


지금, 나는 여름을 걷는다.

그 속에는 아직 다 말하지 못한 마음이 있고,

아직 끝나지 않은 기억이 있으며,

그리움은 바다처럼 출렁인다.




Photo by Jinho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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