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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재 Apr 19. 2019

샤워 꼭지를 돌린다

물줄기가 참았던 눈물처럼 터져 나온다

슬픔이 온몸을 핥고

모든 골짜기를 눈물로 매꿔야만

더 이상 젖지 않을 거야


커피숍에 들어선다

콧속 점막에 각인된다, 검은 눈물의 흔적

같은 자세로 박혀 있는 수도자들

저마다의 유령을 어깨에 짊어지고

비문을 써내려간다

그렇게 사라져 가는 거야


뚝섬역을 지난다

겹겹이 포개진 다세대 군락

오래전 증식을 멈추고 다만 늙어간다

비루한 생활의 흔적 위로 햇살이 촘촘히 꽂히고

형태가 있는 모든 것 저마다 소리 없는 비명을 토해낸다

봄기운에 몸서리친다


덕수궁길을 걷는다

한 줌 바람에 목을 떨구는 꽃잎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며

맨땅에 벌건 얼굴을 비벼대며


블라인더를 올린다

태양이 오늘을 포기하고

파랗게 식어가는 하늘

눈시울을 붉힌 채


남겨진 이는 기다림을 업으로 살아가지만

기다림 끝은 오로지 사라짐

슬픔이 머무는 동안

한걸음 한걸음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초”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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