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재 Mar 04. 2020

은밀한 고백

그날 저녁 비는 수직운동을 부정했어요 대신 작은 입자로 분해되어 공기 중을 떠다니고 있었죠 방향을 잃은 비의 입자들은 그래서 더욱 촘촘히 미세한 공간까지 메꾸고 있었어요 우리는 비의 파편에 부딪히며 걸었죠 그날 저녁 비가 그냥 비였으면 다른 결과가 있었을까 간혹 궁금해요


알아요 사랑한다고 모두 연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 누군가에게 그건 선택의 문제이고 누군가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필연이기도 하죠 불규칙한 비의 입자는 우리에게 선택도 필연도 허락되지 않겠다는 미세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암시를 보내는 듯 했어요 


대륙과 대륙을 접붙인 곳 구석자리의 은밀함에 대해 은밀히 속삭이는 저에게 당신은 혼란스러운 문장들을 해석 불가한 미소와 함께 너무도 능숙하게 투척하고 있었어요 저는 당황스러움을 성과 없이 감추어보려 했지만 당신의 표정에 저의 어리숙함이 투명하게 비쳐지고 있음을 보아야 했어요 


페르시안 타일의 이국적 감성만큼이나 이질적 언어를 교환하며 그래도 어디엔가 감춰져 있을 사랑이라는 단어를 놓치지 않으려 촉수를 곤두세우면서도 무심한 표정을 투사하려 애써보지만 가면은 어른들의 물건이고 저는 아직 아이여서 은밀함에 실증을 느끼고 당황스러움을 소심한 투정으로 드러내며 당신이 제 투정을 구애의 형태로 받아주기를 아직 차마 포기 못한 은밀함으로 기대했었고 이 역시 당신에게 이질적 언어로 다가갈 것임을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빗방울처럼 분해되어 툴툴거리는 파편이 된 제 마음을 당신이 알아챌 수 있도록 은밀하게 거리를 유지했어요 


돌이켜보니 그날 저녁 공기 중에 포화되어 있던 물방울의 파편만큼이나 사랑은 우리의 겹쳐진 어깨에 이미 은밀하게 침투해 있었어요 두 개의 대륙만큼이나 분화된 언어와 이질적인 문화가 당신과 저의 표면을 이국의 타일처럼 감싸고 있어서일까 우리 둘은 그때 서로의 마음이 열려 있음을 볼 수 없었어요 결국 그날의 은밀한 고백은 언어의 이간질을 허락하고 위장막 뒤편 어디선가 아직도 은밀히 계획으로만 남게 되었어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가난한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