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재 Oct 09. 2018

작별

그는 내게 거짓을 말했고 의심 많은 나는 그의 말을 의심 없이 믿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에게 마련해준 믿음은 그의 거짓을 성립하게 하는 완벽한 풍경이 되어주었다 그는 때때로 자신이 인간임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곤 했는데 내가 관심을 보이지 않자 그도 서서히 인간이려고 애쓰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가 나무이거나 냇가의 조약돌이라도 상관없다는 태도였지만 사실은 상관이 없다기보다는 무엇이길 원하는지 알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것은 마치 이쯤에서 내가 줄을 바꾸어야 하는 것 아닐까, 고민하며 만약 그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는 버릇과 같은 것이다 그라면 의견이 없을 것이고 그가 하는 말은 거짓일 것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는 내게 거짓이 성립할 수 없는 문장도 거짓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어느 날 그는 푸른 이끼로 덮인 마당에 대나무로 정갈하게 담을 치고 그 안에 튼튼하고 길이 잘 든 평상을 내놓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평상에 술을 따라 놓고 술 향이 풍경에 퍼지도록 놓아두었다 나는 그가 그 안에서 편안해 보인다고 말했고 그는 내가 거짓을 말한다고 여기면서도 담담히 고맙다고 답했다 그것은 작별이었고 떠나는 나와 떠나보내는 그는 적어도 서로에 대해 예의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다시 그를 찾을 때에는 그가 이끼일 수도 있고 대나무일 수도 있으나 평상 위에 편안히 앉아 있는 그는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옐로자켓 113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