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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희 Oct 19. 2023

미완성입니다



쓰다가
저쪽 문서 보관함으로 보내버린
글들이 언제쯤 빛을 볼까,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간을 잘 보내겠다며
물감, 붓, 이젤, 캔버스, 색연필,
파스텔, 등등
책상을 차지한 도구들에게
민망해지는 지금입니다
그리다가 하차한 스케치와
망친 그림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문서함에 들려
가장 아쉬움이 남는 글 하나
가져다가 못다 한 말들 몇 줄
이어  보기도 합니다
기승전결과 육하원칙을
다시  세워서 겨우 완성해 보지만

깊이 없이 너무 무난한 내용에
공연히 화가 치밀어 노트북을
탁 덮어버렸습니다
이만하면 됐다는 만족은
쉬 오지 않습니다

이 그림도 그렇습니다
열심히 색칠하다 멀찍이
한쪽으로 치워 두었던 것
가까이 당겨 차분히 살피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습니다
어디를 손 봐야 괜찮아지겠습니까
.
.

글을 보면 글쓴이의 성정이
보이듯이 그림은 풍경이든
인물화든 확, 눈에 들어와 박히는
강열한 무엇이 느껴져야 합니다

이도 저도 아닌 무난한 내용들
이도 저도 아닌 낙서 같은 색칠들

내 인생도
아마 이렇게 마감될 것 같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걸맞게
생활한답시고 쥐방울처럼 안팎으로
들락거리다 크게 날숨 한 번으로
들숨을 못하고 이승을 하직합니다

슬기로운 생활도 바른생활도 아닌
돈 몇 푼에 속 끓이다가
허접한 살림살이들 챙기다가
자식의 안타까운 눈물을 예감하며

승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
.
얼마나 해야
어떻게 해야 자기 앞의 생을
적으나마 완성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위에 그런 사람 없었습니다

보기에 그저 좋았더라, 이것이
정답의 근사치가 아니겠습니까
.
.
지금 끄적대는 글도,
여기 그리다 손 놓은 이 그림도
여전히 미완성입니다

.
.

파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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