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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손 거부>

by 이영희


줄거리는 이렇다.

일정한 직업은 없지만 떠들썩한 자리에는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성북동에서는 꽤 인기 있는

손서방. 천성이 터벌터벌 하여 당찮은 구설도 듣지만, 그래도 한 번도 술에 취해 다니지 않으며 안면이 있는 듯한 사람만 지나가면 사람들과 떠들다가도 휙 돌아서 깍듯이 인사하는 것이 그의 특성이다.


어느 날, 손서방이 늘 그의 꽁무니에 줄줄 따라다니는 아들 대성이와 복성이를 데리고 문패를 써달라고 처음으로 나를 찾아온다. 호구 조사 오는 순사에게 여러 말이 필요 없는 방패막이로 호주인 손서방의 이름인 손 거부만 쓰는 게 아닌, 집주소와 식구들의 성별과 이름을 문패 하나에 모두 쓰라며 부탁한다. 그러나 부인의 이름을 묻자 이십 년을 함께 살며 자식을 낳아준 아내인 이름조차 모르거니와 여자란 사람값에 낄 수 없다며 써넣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 후로 그는 자주 내 집에 들러 자질구레한 동네 소식을 알려준다. 손서방이 오늘 찾아온 이유는 큰아들을 늦게나마 학교에 입학시키는데 자식의 기를 세워주려면 아비 된 도리로 맨머리로는 학교에 갈 수 없다며, 손서방의 머리엔 맞지 않는 모자를 빌려 쓰고 갔다.


손서방은 학부형이 되었다는 자부심에 마른일 진일 가리지 않고 채석장에서 일을 하다 엄지 손가락을 돌에 짓쳐 아주 못 쓰게 될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아들은 학교에서 저능아라는 판정을 받아 아예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말까지 듣게 된다.


며칠 뒤에 손 거부는 대성이 복성이를 데리고 그의 말대로 벨걸 다 쓴 문패를 떼어 들고는 다시 나를 찾아온다. 아침에 아내가 아들 또 하나 낳았다며, 이놈은 글을 잘해서 국록을 좀 먹을 수 있는 이름을 지어달라고 한다. 나는 녹자를 넣어 손녹성이라 지어준다.

학교를 그만둔 큰 아들 대성이에 대한 변명으로 대학까지 못 가르칠 바엔 일찌감치 막벌이를 하는 게 낫다며 손서방은 둘러댄다. 나는 거짓인 줄 알지만 그의 말을 곧이듣는 체할 수밖에 없었다.



느낌을 적어 본다.

손서방도 성북동에서는 꽤 인기 있는 사람이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앞장의 소설인 ≪달밤≫에 나오는 주인공 또한 재미있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작가는 소설 속의 화자인 ‘나’를 통해 주변 인물이 생각이 모자란다고 혹은 넘친다고 함부로 대하거나 멀리하지 않으며 면면을 관찰하여 이야기를 엮는다. 구절구절 살짝살짝 웃음을 자아내지만 행간마다 일제 강점기와 맞물려 돌아가는 서민들의 무지와 설움이 곳곳에 배어나게 한다.


≪손 거부≫는 이름처럼 거대한 재산가가 아닌 올망졸망 처자식을 거느리고 사는 아비일 뿐이다. 그는 못 배웠고 행색은 초라하지만 나름대로 아비로서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려 한다. 깍듯한 인사로 또는 한 번도 술 취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호구조사 나오는 일본 순사에게 무시당하며 일일이 말대 거리를 하고 싶지 않아 문패에 별걸 다 적어 달라는 대목에선 재미보다는 아릿하다.


아들을 학교에 입학시키려 가면서 모자를 빌려 쓰는 장면에서는 지식인에 대한 동경이 드러난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자에 글을 배워 ‘국녹’을 받는 공무원을 희망해보는 것도. 그리고 지식층에

속하는 화자인 ‘나’를 가까이 알고 지냄으로 자신도 그만한 위치로 상승되는 기분을 갖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람값을 못한다며 여자를 무시하는 대목에선 왜 그의 아내가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받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작가는 손서방의 무지함을 빗대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 작품의 의도일 수도 있겠다.

1930년대, 이전, 그 후에도 오랫동안 여자에 대한 차별은 아무렇지 않은 사회현상이었지 싶다. 여성의 위상이 이만큼 나아진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마지막으로 인상 깊은 구절은 이것이다. 손 거부의 큰 아들이 더 이상 학교에 못 다니는 이유가

아이가 저능아여서 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모자라든 넘치든 자식은 아비가 끝까지 품어야 한다는 책임을 보여준다.

비록 어리석은 면이 있지만 ≪손 거부≫는 클 ‘거’에 아비 ‘부’ 자를 써서, 작가는 어쩌면 만물을 길러내는 아버지란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닌지.





**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 1904~?)은 깔끔하고 운치 있는 문장과 짜임새 있는 구성, 그리고 무엇보다 개성 있는 인물 묘사로 소설 문학의 진수를 보여준 작가다. 그는 1930년대의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구인회’에서 활동한 데 이어, 『문장』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우리 문학사에 적지 않은 공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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