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휘영청 둥근달이 온 세상을 밝게 비추고, 마을에는 고요가 깃들었다.
신은 달빛을 받으며 사뿐사뿐 길을 걸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여름밤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신은 그 정취를 독차지하여 잠시 마음이 선선했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서서 인가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귀를 열었다.
새근거리는 규칙적인 호흡과 드르렁거리는 코골이 사이로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 그릇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이따금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여기에 풀벌레 소리를 덧씌우자 그 화음이 더없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밤이 깊게 내렸으니 인적도 끊어져 더욱 한가롭고 자유로웠다.
길 위에는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네….’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쓸쓸함에 사뿐하던 발걸음이 저적거렸다.
‘역시 백귀 때문이겠지?’
사람들은 백귀를 무서워한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마을에 나타나 납치라는 해를 입히는 탓이다.
그러나 신의 생각은 다르다.
백귀는 사람을 해하지 않는다.
구원할 뿐이다.
백귀, 신.
신은 급격히 가라앉은 기분을 떨치려 고개를 휘휘 가로저었다.
‘얼른 한 바퀴만 돌아보고 가자.’
발걸음은 가라앉은 마음의 무게만큼 무거워졌다.
그때였다.
“저를 데려가 주세요.“
신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적이 놀랐으나 그렇지 않은 척했다.
등 뒤로 숙녀라기에는 아직 앳된 소녀가 서 있었다.
“널 데려가라고?“
”네. “
“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야심한 시간에 돌아다니다니 겁도 없구나.”
“당신은 백귀잖아요. 절 데려가세요.”
“넌 백귀가 무섭지도 않으냐?“
소녀가 눈알을 또르르 굴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 전혀 무섭지 않아요.“
“전혀?”
“그게…, 사실은 조금 무서웠는데, 막상 백귀님의 얼굴을 보니 괜찮아졌어요.”
신은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내가 백귀라고 누가 그래. 그런데 내 얼굴이 왜?”
“왜 긴요. 저는 살면서 백귀님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정말 아름다워요. 달빛마저 후광이 되어버리는 백귀님의 눈부신 용모에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에요.“
신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백귀가 무섭지 않은 것과 무슨 상관이지?”
“얼굴이 이토록 아름다운 분이라면 마음도 분명 아름다울 거예요.”
소녀는 자신의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인 후, 곁눈질로 슬쩍 신의 눈치를 보았다.
흐음, 신은 한숨을 내쉬며 핀잔하듯 대꾸했다.
“백귀가 납치해 간다는 말 못 들었어?”
“그건 소문일 뿐이죠. 제 생각은 달라요.“
“흥.“
소녀는 씨익 한 번 웃고는 자신의 생각을 떠들기 시작했다.
“제가 백귀님께 관심이 아주 많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라진 사람들에 대해 조사해 봤어요. 그러다 제가 뭘 발견했는지 아세요? 바로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에요.“
“공통점?“
신은 저도 모르게 소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네, 그게 그러니까, 그 사람들에겐 하나의 불행이 늘 함께했다는 점이에요.“
“불행한 일 한 번쯤 안 겪어 본 사람은 없어.”
신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우리 마을에 판 씨라고 있었어요. 판 씨가 사라지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밥을 짓다 작은 불이 났는데, 불은 금방 꺼졌어요. 소방관이 출동할 것도 없이 지나가던 이웃이 연기를 보고 불이 났다고 고함을 쳐서 몇 사람이 물을 부어 꺼뜨렸대요. 여기서 이상한 점은 판 씨가 옆으로 번지는 불을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놀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불 속에 빠져들 것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대요. 그래서 바로 옆 집에 살던 우 씨가 판 씨를 끌어내듯 밖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세상에, 양 팔에 화상을 입었다지 뭐예요. 우 씨는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화상을 입을 만한 큰 불이 아니어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치료가 급하니 당장 의료원으로 데려갔대요. 어쨌든 상처는 남았지만 화상은 다 치료가 됐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판 씨가 말을 잃었어요.“
소녀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사실 판 씨는 3년 전에 아이를 잃었어요. 갓 백일이 지난 아이였죠. 그런데 아이를 잃은 것이 판 씨에게만 슬픈 일이었나봐요. 물론 판 씨의 남편인 오 씨도 처음엔 슬퍼하며 가여운 부인을 달래주었어요.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죠.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그건 뭐 저도 이해해요. 판 씨를 보살필 여력이 없던 오 씨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부인의 병간호를 부탁했어요. 그런데 그 어머니는 판 씨가 탐탁지 않았나봐요. 잘 보살펴주기는커녕 못된 말만 골라 했다지 뭐예요. 고작 아이 하나 잃었는데 뭐 잘 했다고 자리 펴고 누웠냐, 아이는 또 낳으면 되는 걸 엄살 피운다, 아직도 드러누워 게으름 피운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죠? 판 씨의 슬픔과 고통이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짓밟혔어요.“
소녀는 분한 듯이 씩씩거렸다.
“얼마 후 판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긴 했어요. 기력이 회복되지 않은 채로요. 그리고 그 기력은 영 돌아오지 않았어요. 역시 마음의 병 때문이겠죠? 그 시절 판 씨를 시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어요. 마지못해 자리를 털고 일어난 판 씨는 마치 죽은 사람 같았어요. 그때는 저도 아직 어릴 때라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판 씨의 심정을 조금 알 것 같아요. 아주 조금요.“
소녀는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리고 그 눈앞까지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만 펼치고 손가락 한 마디만큼만 벌려 보였다.
“오 씨가 뒤늦게 의료원을 데리고 가기도 했는데 한참 늦었죠. 정말로 힘들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잖아요, 딱하게도. 아무튼 그렇게 2년이 지나도록 삶의 의욕이 돌아오지 않는데다 말까지 잃은 판 씨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어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이죠. 오늘처럼 보름달이 뜬 밤이었어요. 다들 쉬쉬 했지만 역시 백귀님의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었죠. 어쨌거나 사람이 사라졌으니 치안관이 출동했어요. 판 씨의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온 마을을 다 조사했는데 사건의 증거나 실마리가 될 만한 무언가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대요. 그래서 치안관은 단순 가출로 사건을 마무리했어요.“
소녀가 고개를 휙 돌려 옆에 선 신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어때요? 이건 납치일까요, 구원일까요?“
신은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다른 사례도 들려 드릴게요.“
“아니, 필요없어.”
“들어보세요.“
신은 막무가내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소녀를 흘겨보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