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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냐-.”
“네, 할아버지. 식사는 하셨어요?“
“그러엄, 지금이 몇 신데. 너는 먹었냐-?“
“그럼요, 지금이 몇 신데요.“
노인과 소녀는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 씨익 웃었다.
두 사람은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고용인이 내온 차를 홀짝이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지 뭐예요.”
‘휴’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소녀가 말했다.
“조심해. 그러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큰일나.”
“조심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저도 모르게…….”
소녀는 그 답지 않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래.”
노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다 저 멀리 산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내일부터는 오지 말어.”
“왜요?“
평소보다 정갈해진 마당이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
“내가 말 안 했냐? 저어기 멀리 간다고.”
“그런 말을 언제 했어요. 멀리 어디로 가는데요?”
“있어. 저기 산속에 노인들만 모여 사는 데.”
“그럼 할아버지 밥은 누가 해줘요?“
“바압? 글쎄다. 허허.“
“그런 것도 모르고 가면 어떡해요.”
“가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멀리 간다면서 그렇게 아무 대책도 없이 간다고요?”
“살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게 뭐어 그리 중요하냐.”
“살 날이 왜 얼마 안 남아요…….“
문득 이 순간이 노인과의 이별이자 마지막이 될 순간임을 깨달은 소녀는 미지의 그리움이 밀려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어째 오늘따라 흐르는 세월이 야속하다-.”
노인이 소녀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소녀는 노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노인의 집에 찾아가 대문 앞에서 다짜고짜 소리쳤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몇 번의 부름 끝에 고용인이 대문을 살금 열고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얘야, 어르신 안 계셔.“
고용인이 소리 죽여 말했다.
“할아버지 벌써 가셨어요?”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애처롭게 말했다.
“그게…, 새벽에 일찍 인사도 없이 떠나셨어.”
“정말요? 정말로 멀리 떠나셨다고요? 인사도 없이?”
망연히 고용인의 말을 되물었다.
“그래, 마지막 인사도 없이 혼자 떠나셨어.“
고용인은 슬쩍 뒤를 살피고 소녀를 돌려보냈다.
소녀는 믿기지 않았다.
마지막 인사라도 하고 싶어 동이 트자마자 무거운 눈을 겨우 뜨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허탈함과 서운함, 그리움이 뒤섞여 눈물이 맺혔다.
소녀는 훌쩍거리며 노인의 집 담벼락을 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그때 담장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노인의 아들 내외였다.
“그게 이 집안의 전통이라면서요. 근데 왜 당신이랑 같이 가지 않고 혼자 사라지셨냐고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아.“
남자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게 전통 운운하며 어디를 보내니 마니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아버님이랑은 이야기가 다 됐다면서요?”
“이야기가 됐으니까 오늘로 날을 받은 거지. 그리고 당신도 더 이상 시아버지 안 모셔도 된다고 한시름 놨었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요. 어차피 따로 사는데. 가끔 들여다보는 게 성가시긴 했지만 싫진 않았다고요.”
여자가 발뺌하며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애초에 그 전통인지 뭔지가 늙은이를 죽으라고 산에 내다 버리는 거지, 무슨 집안 전통이야. 우리도 늙으면 그렇게 산에 버려지겠네요. 어휴.“
남자는 제 성질을 더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날 받아놓고 어디로 사라진 거야!“
“아유, 깜짝이야. 어디 그렇게 소리쳐서 온 동네에 다 들리겠어요?”
여자는 빈정빈정 말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덧붙였다.
“그럼 우리 이제 어떡해요.”
“뭘 어떡해. 빨리 찾아야지.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야.”
“여기서 우리가 너무 소란스럽게 찾으러 다니면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겠어요?“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노망 난 늙은이가 집을 나가서 찾으러 다닌다고 하면 되지.”
담벼락에 기대어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소녀는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눈물 자국을 지우고 고개를 획 돌려 뒤를 보았다.
그곳엔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누나가 여기 사는 할아버지 친구 맞지?”
“친구? 음…, 맞아. 친구. 그런데 넌 누구니?“
“난 이 집 할아버지 손자야.“
“그런데 나한테 무슨 일이니?”
“할아버지가 전해 달래.”
“뭘?”
소년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어 펼쳤다.
“령아, 혹 작은 숙녀가 나를 찾아오거든 전해다오. 이 늙은 이는 분에 넘치게 좋은 곳을 찾아 떠난다. 너도 네가 있을 곳을 찾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서두르지 마라. 사람은 누구나 때가 있는 법이니. 언젠가 너와 다시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소망을 간직하고 남은 날을 살아도 되겠느냐. 이 작은 소망이 늙은 이의 마지막 즐거움이 될 것 같구나. 건강해라.“
소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손을 뻗어 소년이 들고 읽는 종이를 잡아챘다.
“찢어질 뻔했잖아. 이리 내. 그건 할아버지가 나한테 남긴 편지란 말이야.”
“읽고 줄게. 기다려.”
소녀는 소년이 읽어준 곳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었다.
소녀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듯하더니 입을 삐죽대다 결국 꾹 다물었다.
그제야 세상과의 이별을 실감한 사람처럼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울어?”
신이 놀라 물었다.
“눈이 따가워서 그래요.“
옷소매로 눈을 벅벅 닦으며 소녀가 답했다.
“나 따라온 거 벌써 후회돼?”
“아니에요. 그런 거.”
신은 정면을 응시한 채 질문했다.
“그럼 할아버지 보고 싶어?”
소녀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네. 보고 싶어요.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친구였거든요.“
“내가 사는 곳엔 너와 닮은 사람이 많아. 그들이 너의 새로운 친구가 되어 줄 거야.“
신은 소녀의 발걸음에 맞춰 다시 천천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