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에는 상하로 뚫린 터널이 보였다. 눈으로 보자마자 어느새 내가 그 터널 안에 들어와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수많은 시체들이 즐비했다. 모두 몸은 없고 해골만 남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원한이나 불만족에 휩싸인 듯한. 그들을 지켜보는 나조차 힘들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더 깊이 내려가고 싶은데 속도가 나지 않았다. '아래로 내려가고 싶다', '이 해골들을 빨리 지나치고 싶다.' 해골들뿐인데, 팔도 없는데 내 몸을 잡아채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두 명이 아니라 수백 개의 해골들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수많은 해골들이 가득했다. 다들 불행한 표정으로 원한에 사무쳐 나를 잡아당겼다.
'이곳을 지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순간, 깊게 호흡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평상시 나는 단전 호흡을 하지는 않는다. 가끔 횡격막 호흡으로 심호흡을 할 뿐인데. 그런데 깊은 호흡이 나를 구해줄 것 같았다. 눈을 감고 깊은 호흡을 하자 몸이 쑥 딸려 내려갔다. 진공이나 블랙홀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온 것 같았다.
해골들을 초광속으로 통과해 깊은 지하 세계에 온 것 같았다. 편안하고 안온했다. 공간이 바뀌었다. 공간만이 아니라 분위기도 바뀌었다. 절대 침묵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하늘에서 둥그런 차원의 문이 열렸다. 어두웠던 윗부분에서 빛이 새어 나와 원 모양으로 커지더니, 열여덟 살 정도의 아릿따운 처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발로 걸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사뿐하게 구름을 밟듯이 날아왔다. 슬로우모션이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고 견고한 움직임이었다. 가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공간의 중간에 멈추어 나를 바라본다. 나도 어느새 그녀의 용모에서 눈을 떼어 눈빛을 바라본다.
‘…………… 어머니!’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빛으로 둘러싸여 노란색 한복 치마와 연두색 저고리를 입고, 옷에서는 다양한 광채를 풍기며 어머니가 나를 보고 계셨다.
어머님께서 45살에 나를 낳았기에 노산이었다. 1931년생이라 어머님 젊었을 때 사진이 별로 없다. 옛날 사진을 여러 장 보았지만 저렇게 아름답고 온화하며 젊은 어머님을 뵌 적이 없다. 사진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렇다. 내가 여섯 살 무렵 인식을 한 순간부터는 어머님은 항상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아버님이 세 살 때 돌아가시고 홀로 나를 키우시느라 갖은 고생을 하신 모습만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저 열여덟의 처자는, 혹은 열여섯 정도로 보이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직감적으로 어머니라는 것을 안 것이다. 어려 보이지만 생기가 가득해서 그렇게 느껴진다. 전혀 미성숙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아릿따운 꽃처녀가 따로 없다.
'저런 분이 어머니라니.....'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눈으로 보고 향기를 맡는 것보다 더 정확했다. 틀릴 수가 없다. 그냥 파장의 세계는 거짓이 없다는 말이 실감 난다.
그녀가 따뜻하고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빛으로 환하고 아름다워서 황홀한 무아지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고맙습니다.'
어머님은 파장으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정성이 가득 담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어머님께 의아했지만, 어쨌든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려고 했다.
그녀는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무언의 약속과 함께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떠나려고 했다.
나는 아직 그곳에 닿을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함께 가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내가 갈 곳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단지 어머님께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고 어머님은 그곳에서 꽤나 만족스러운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머님은 공손하게 최대한의 존중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행복감과 평온함을 갖고 있었다. 파장으로 그렇게 느꼈다. 상당히 존중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것으로 어머님과의 인연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인데 전혀 서운하거나 슬프지도 않았다. 이곳은 내가 인간으로 가졌던 감정과는 다르게 운영되는 세계 같았다.
어머님은 그러고는 유유히 하늘문이 열린 곳, 조금 전에 오셨던 곳으로 유유히 올라가시는 것이었다. 황금빛 둥근 모양의 원으로된 문이 점처럼 닫히고 나는 물끄러미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어머님이 지상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보여서 나도 마음이 편안했다. 하늘문이 순식간에 닫히자 어둠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