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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감상문

by sleepingwisdom

결핍이 만드는 터널, 그리고 멈춤의 힘

마트 앞에 섰는데, 장을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 망설였다.


냉장고는 비었지만, 이번 주 지출이 너무 많아서 카트를 밀고 들어가기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집에 먹을 게 없으니 뭔가 사야 했고,


‘간단히 몇 가지만 사자’고 다짐했지만, 어느새 리스트가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었다.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 사이에서 마음이 계속 흔들렸고,


결국 발걸음은 그 자리에서 한참 멈춰 있었다.




결핍이 뇌를 지배할 때

우리는 이렇게 자주 사소한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쓴다.

그건 단순한 우유부단이 아니다.

결핍이 우리의 뇌를 침식한 결과다.


돈이 모자라거나 시간이 부족하거나, 감정적으로 고갈됐을 때, 사람의 뇌는 더 빨리 피로해지고 더 자주 실수한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인지적 과부하'라고 부른다.

결핍 상황에서 우리 뇌는 생존모드로 전환되어, 당장의 문제 해결에만 모든 자원을 집중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무언가가 부족할수록 우리는 더 나쁜 결정을 내리기 쉽다.

가난한 사람이 더 비싼 대출을 받고, 바쁜 사람이 더 비효율적으로 시간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핍이라는 렌즈

결핍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시야를 바꾸는 렌즈다.

가난은 통장 잔고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건 매일 돈을 계산하느라 피곤한 뇌, '조금의 여유도 사치'라고 여기는 마인드셋이다.



시간이 부족한 사람은 늘 급하다.

할 일을 쪼개고 묶고 재정렬하느라, 막상 중요한 일은 늘 다음으로 밀린다.

관계에 결핍이 있는 사람은, 아무 말에도 상처받고, 작은 관심에도 휘청인다.



외로움이 깊을수록 사람들의 작은 말과 행동에서 거부나 무시의 신호를 찾으려 한다.

그렇게 결핍은 단지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버린다.




터널링의 함정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터널링'이라고 한다.

눈앞의 문제에 몰입하면서, 주변이 다 흐릿해지는 것.

마치 터널 안에서 앞만 보고 달리는 것처럼, 당장의 문제 해결에만 집중하게 된다.



계획도, 감정도, 관계도, 전부 '지금 해결해야 할 일' 바깥으로 밀려난다.

월말이 되면 돈 걱정에 사로잡혀 친구들과의 약속을 취소하고, 야근이 계속되면 가족과의 시간도 '나중에'로 미룬다.



결국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에 집중하다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는 까맣게 잊는다.

장기적 목표는 사라지고, 창의적 사고는 멈추며, 인간관계는 점점 얕아진다.




진짜 자아를 잃다

무서운 건, 이 상태가 오래되면 사람이 자기 자신을 오해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나는 원래 이런 성격이야."

"나는 계획을 못 세워."

"나는 왜 이렇게 감정에 휘둘리지?"

하지만 이건 진짜 자아가 아니다.



결핍이라는 압력 속에서, 최소한의 선택만을 겨우 이어가고 있는 자아일 뿐이다.

여유가 있을 때의 당신과 결핍 상황에서의 당신은 거의 다른 사람이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경제적 여유가 있고, 사랑받는다고 느낄 때의 당신은 더 관대하고, 더 창의적이며, 더 따뜻하다.

결핍은 우리의 최악을 끌어내지만, 그것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다.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그렇다면 어떻게 이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결핍은 우리가 '잘못 살아서' 생기는 게 아니라, 인지 자원이 바닥났을 때 찾아온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려면 '내가 더 나아져야지' 같은 추상적인 다짐보다, 조금이라도 뇌가 쉴 틈을 만들 수 있는 구조를 짜는 게 더 중요하다.

핵심은 의지력에 의존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들

첫째, 결정의 양을 줄이는 것이다.

아침에 뭘 입을지 매번 고민하는 대신, 자주 입는 옷을 몇 벌 정해두자.

하루 식사는 가능한 정해진 시간, 정해진 메뉴로 단순화하자.

스티브 잡스가 매일 같은 옷을 입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은 결정에서 에너지를 덜 쓰면, 진짜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틈이 생긴다.



둘째, 충동적인 해결 욕구를 잠시 유예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 갑자기 '운동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등록하지 말고 일주일만 더 기다린다.

그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하고 싶다면, 그게 진짜 필요일 가능성이 높다.

결핍은 당장의 감정을 더 크게 만든다.

그래서 시간을 잠시 들이밀어야 진짜 욕망과 위기 반응을 구별할 수 있다.



셋째, '완충지대'를 만드는 것이다.

예상보다 10% 더 많은 시간을 계획에 포함시키고, 예상보다 10% 적은 돈을 쓰려고 노력한다.

이런 여백이 있어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결핍모드로 빠지지 않는다.





멈춤의 힘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냥 있어도 되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일부러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오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되는 공간.

그 안에서 사람은 다시 방향을 찾는다.



결핍은 '더 해야 한다'는 압박을 준다.

하지만 진짜 해결은 '덜 해도 된다'는 감각에서 온다.

이것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결정을 하나 미루는 것, 지갑을 닫고 생각을 여는 것, 하루 중 30분만이라도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나를 허락하는 것.

결핍은 그렇게 조금씩 물러난다.





덜 하기로 결정하는 용기

삶이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자꾸 뭔가를 더 하려 한다.

더 배우고, 더 벌고, 더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어떤 날은 '덜 하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결핍이 만든 좁은 터널 속에서 조금 더 넓은 시야를 회복하고 싶다면, 무언가를 바꾸기 전에, 잠깐 멈추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우리는 달리는 중에는 지도를 볼 수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멈춘 사람만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다시 생각할 수 있다.

그 멈춤 속에서, 결핍에 가려져 있던 진짜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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