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리피언 Sep 27. 2022

설악산 흔들바위 vs 북한산 출렁다리

뭘로 환생할래?

설악산 흔들바위와 북한산 출렁다리, 둘 중 하나로 환생할 수 있다면, 무엇으로 환생하시겠습니까?

왜요?


다짜고짜 무슨 소리냐고? 위 질문은 올해 KBS 입사시험 예능PD 필기시험 작문 주제다. 재기발랄한 예능PD를 뽑겠다는 야심찬 포부가 엿보인다. 그런 회사의 의도와 달리 뭥미?라는 표정으로 진땀을 흘렸을 것 같은 입사 준비생들에게는 엄마의 마음으로, 경험자의 마음으로 등 한번 두드려주고 싶다.


바야흐로 언론사 입사시험철인가보다. KBS는 물론 조선일보, MBC, JTBC 등 많은 신문사, 방송사들이 공개채용을 진행 중이다. 오랜만에 필기 기출 문제를 만나니 '라떼' 시절 생각이 났다.


지금은 더한 것 같기도 하지만, 2000년대 초반에도 언론사 입사자 대부분은 졸업자였다. 말하자면 백수로 좀 묵은 상태란 얘기. 내가 대학졸업할 때도 이미 취업난이 심하고, 일자리가 없다는 이야기가 많이 돌 때였지만, 그래도 아직은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하는 게 당연한 때였다. 크든 작든 직장인이 된 친구들 사이에서,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보장도 없는 언론사 입사시험을 보겠다고, 다른 곳은 입사지원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취직도 안 된 상태로 학사모를 쓴 딸내미의 졸업식에서 아빠는 참 복잡한 표정이었던 기억이 난다.


입사 준비 기간은 참 힘들었다. 그래도 졸업 전에는 소속이라도 있었는데. 대학까지 졸업시켜놨는데 아직도 손내미는 띨띨한 딸내미인 것도 미안한데, 오래 잡고 있는다고 합격된다는 보장도 없고, 결국 1년이 넘어가면서는 일반 기업에 원서를 내볼까 싶기도 하고, 하고 싶던 공부를 더 한다는 핑계로 대학원을 갈까 싶기도 했다. 불안감이 사람을 얼마나 좀먹는지 그때 조금은 느껴봤던 것 같다.


수십 번의 입사시험 탈락은 자존감을 계속 떨어뜨린다. 입사시험 준비를 시작하는 봄에서, 시험이 시작되는 가을에서 입사시험이 거의 마무리되는 겨울로 가면서 남은 준비생들은 점점 피폐하고, 예민해진다. 나는 계속 여기있는데, 너는 가는구나. 그러다보니 스터디에서도 자잘한 다툼들이 난다. 그러다 봄이 되면, 다른 길을 찾겠다며 짐을 싸기도 했다.


그 시기 가장 나를 괴롭히던 불안감과 자괴감 속에서 그나마 조금씩 나를 꺼낸 것은 조금씩 나아지던 성과였다. 1차에서 2차로, 2차에서 3차로, 가장 많은 숫자가 떨어지는 필기에서 붙기 시작했고, 그럴 때는 제법 빛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크게 부풀었을 때 터지는 풍선이 충격도 더 크지 않나. 메이저 방송사 시험 합숙까지 다녀온 뒤 떨어졌을 때, 나도 짐을 쌌다. 아, 하얗게 불태웠어라면서.

근데 뭐, 배운 도둑질이라고, 결국 사흘만에 다시 책을 폈지만 말이다.

뱅크시가 모 방송사 4차에서 떨어졌을 때 내 심정을 알고 있다니. 픽사베이

꿈꾸던 메이저일간지나 방송사는 아니었지만, 내가 기자 명함을 팔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졸업 후로는 1년 2개월이 지난 다음 해 4월이었다. 여기도 틀렸네 싶었던 곳이었는데 합격 공지에서 내 이름을 발견했고, 대학에 들어갔을 때처럼, 아, 이제 됐다는 착각을 그때도 한번 더 했던 것 같다. 역시 뭘 몰라야 즐겁다. 하하하


이제 지났으니 드는 생각이겠지만, 언론사 입사 준비는 나를 제법 성장시켰던 것 같기도 하다. 하루에 신문을 8개씩 보고, 밥을 먹듯 글을 썼고, 인생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책을 읽었다. 밥먹고 할 일이 그것 뿐이니까. 입사를 하고 나선 내앞에 떨어진 과제를 해결하기에만도 급급해 나를 채울 시간이 없었다. 대학 4학년 때부터 2년 정도 되는 입사 준비 기간이 아니었다면, 내 밑천은 아마 더 빨리 바닥이 났을 것 같다.


그러니 입사 준비를 한 기간이 내 인생에 가장 크게 남긴 것은 내 인생에 대한 사색과 앞으로 삶에 대한 철학....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남편이다. 언론사 입사 준비 모임에서 사귀기 시작해 15년째 같이 살고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수다처럼 토론 주제를 나눴고, 쓴 글을 나눠 읽다보니 언론사보다 서로를 더 많이 알아갔...둘 다 떨어졌으면 공부한다더니 연애만 했다고 욕깨나 먹었겠다.


불안감과 자괴감이 나를 갉아먹는 상황에서, 우울함만 계속될 것 같은 취준생활에 연애는 비타민과도 같은 것이었다. 불안한 미래와 당장의 뼈를 깎는 고통이야 모르지 않는 바지만, 취준생들이여, 그래도 연애도 하고, 놀기도 하고, 여유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좀 가지면 좋겠다. 집에 취준생 있는 분들도 좀 이해를 부탁합니다. 회사들은 공부만 한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지 않나요(네 저도 이 핑계로 놀았어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북한산 출렁다리세요, 설악산 흔들바위세요?


아이에게 이 얘기를 해줬더니, 방송PD 하고 싶다는 친구에게 가서 얘길해줬단다. 골똘히 고민하던 이 친구 대답은 북한산 출렁다리. 왜? "난 사람들이 날 많이 보러오는게 좋아. 북한산이 더 낮으니까 거기로 더 많이 오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날 보러 오다니, 정말 너무 좋아!"

다른 건 몰라도 너의 그 인싸력은 참 합격감이로구나!

작가의 이전글 엄마, 감칠맛 좀 사드릴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