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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리피언 Jul 17. 2022

초심자의 운? 초심자의 실력

당신의 수습을 다시 보면

오랜만에 MBC 예능 나혼자산다를 보는데 진행자 전현무 씨의 그림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의 그림 속의 신선한 색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내가 미술을 배운 적이 없어서 나오는 색채라더라"는 전문가의 이야기를 전했다. 초심자라서 할 수 있는, 초보라서 보여줄 수 있는 능력. 이 에피소드를 보다보니 내 수습 시절 생각이 났다.


20대 중반의 첫 입사, 메이저 언론사가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꿈을 이뤘다는 기쁨에 들떴다. 아, 나도 이제 기자구나. 설렘과 깔깔거림이 넘치는 오티를 마친 뒤 부서 배정을 받았는데 아, 이런.. 생각도 해보지 않은 부서에 배정이 됐다. 대체 이럴거면 희망부서는 왜 받은건지. 3순위 안에 들어있지도 않은 부서였다. 사실 전혀 모르는 영역이라 가면 민폐가 될 것 같아 신청도 안 했던 거였다. 하지만 뭐 입사 한 달차가 가라면 가고, 까라면 까는 거지. 될대로 되라...고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역시 쉽지 않은 시간이 시작됐다.


내 사수를 맡은 선배는 입사 10년차가 넘은 사람이었다. 외적으로도 비쳐나오는 꼬장꼬장함에 나는 잔뜩 위축됐다. 선배의 첫 지시는 아이템 발굴. 밤에 자기에게 따로 전화를 해서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스물 여섯에도 뭔가를 검사받아야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일단 시킨 건 해야 되는 타입이라 종일 머리를 싸메고 찾아낸 아이템을 보고했다. 첫 보고에서 선배는 "너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라고 전화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어떻게 하란 말도 없이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어..어쩌지. 설마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 걸 보고했을리는 없지 않냐?고 말해볼 생각은 당연히 없었고, 선배들이 시킨 잡일 사이 사이 하루 종일 고민한 아이템이 날라갔으니, 나는 다음 날 아침 아이템을 제출하지 못했다.


이런 날이 첫날 하루 뿐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정말 한 글자도 틀리지 않은 "너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가 그 주 내내 계속됐다. 모두 까였으니 나는 그 주 내내 아이템을 제출하지 못했다. 문제는 다른 선배들과 부장이 그 사정을 모른다는 거였다. "얘야, 아이템 안 내니?"라는 모 선배 말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랐다.


그 상태로 버티기 아닌 버티기를 한지 일주일 째,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전날도 여전히 말이 안된다고 아이템을 까였지만, 여기서 더 아이템을 제출하지 않았다가는 나는 수습 주제에 능력없고, 게으르고 말 안듣는 애라고 찍힐 게 뻔하다는 공포가 턱까지 차올랐다. 내 결정은, 사수에게 까인 아이템을 그냥 제출하는 거였다.

결과가 어땠냐고? 면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톱기사 당첨. 부서 배정 첫 기사로 톱기사를 썼다.


분노가 극에 달했다. 부장은 내 아이템을 말이 된다고 판단했다는 것 때문이다. 나는 입사 열흘만에 내 사수를 전혀 신뢰할 수 없게 됐다. 선배는 아무 말도 없었다. 왜 그 아이템을 냈냐고 혼을 내지도, 기사를 잘 썼다 못 썼다 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게 내가 자기에게 까인 아이템이라는 걸 기억은 하는지 모르겠다.


이것 말고도 여러가지 이유로 나는 부서 배정 한 달차 만에 회사에 출근해 "노트북 돌려드리러 왔다"며 퇴사를 선언했다.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으면서 꼬투리만 잡히면 편집국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사수 덕에 근 한 달을 울며 퇴근을 하던 참이었다. 백수 딸이 취업했다고 그렇게 좋아했던 아빠가 "그렇게 울 거면 그만두라"고 했다. 대체휴가로 모처럼 쉬던 평일 아침에 아이템 제출을 안했다고 선배에게 전화를 받고는 겨우 닫아놨던 뚜껑이 날아갔다. 물론 아무도 쉬는 날까지 아이템을 제출해야 한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사수가 아닌 바로 윗 기수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그만두진 않았다. 관심도 안 두던 수습을, 이제서야 부서 선배들마다 붙잡고 설득하는 판에, 입사 두 달만의 퇴사는 나에게도 너무 큰 상처로 남을 것 같아서 무서운 김에 퇴사를 번복했다. 대신, 어차피 갈데까지 간 김에 "왜 일을 가르쳐주지도 않고 혼만 내냐", "앞으로도 이럴거면 그냥 그만두게 두라"고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다. 다들 "몰랐다"고 했다. 그래, 다들 바쁘시죠. 그럼 이제라도 일 좀 가르쳐주시겠어요?


그렇게 퇴사를 번복하고, 나는 이 회사를 10년 다녔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다행히도, 퇴사 소동 다음 달 인사 이동으로 아무 생각없던 부장과 사수가 다른 부서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새로 온 부장은 수습에게는 '기대'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칭찬만 했다. "너는 사진 설명을 잘 쓰는구나", "이거 재밌네". 한 줄짜리 사진 설명으로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거였다니. 3매짜리 현장 박스가 재밌다니. 박살 났던 자존감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일이 재미있어졌고, 이것도, 저것도 해봐도 되냐고 부장에게 물어보면 그냥 다 하게 두셨다. 못한 건 별말 안하고, 잘한 것만 얘기해주셨다. 아, 이 일을 해도 되겠구나. 그렇게 나는 이렇게 저렇게 15년을 기자라는 이름을 달고 살았다.


회사에 적응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첫 사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게 하던 식으로 굴어서 회사를 나간 사람이 더 있었다고 했다. 진작 얘기해줬으면 나 자신을 그렇게 자책하진 않았을텐데. 그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이란 걸 알았으면 덜 힘들었을텐데. 뭐 그런 얘기를 해주기엔 선배들도 다 각자 바빴다.


그의 기사는 재미가 없었다. 기사에 전문 용어도 많고, 데이터도 많았고, 무엇보다 길었는데 잘 읽어지질 않았다.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그가 "기사가 되냐"고 소리를 질러댔던 내 아이템들은 대부분 잘 모르는 사람의 시선으로 본 쉬운 내용들이었다.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기자로 일하면서 보니 그 선배가 놓치고 있던 게 그거였다. 기자는 대부분 담당 분야와 출입처가 있는데 한 분야 일을 오래 하다보면, 그 분야의 전문 용어나 특수한 상황들이 너무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된다. 그래서 독자가 그 내용을 모를 거란 생각을 못한다. 예를 들어 법조기자로 오래 있던 기자들은 구형, 선고를 구분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많다는 것도, 민사와 형사가 어떻게 다른지 일반 독자들은 잘 모른다는 것도 잊어버린다.


이것 때문에 수습이 능력자가 될 때가 있다. 오랫동안 보아 온 사람들의 눈에는 안 보이는, 그런 부분이 보일 때가 있다는 거다. 그 분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의 시선으로 궁금한 것이 일반 독자들 역시 궁금한 지점일 수 있다. 오랫동안 그 분야를 보아 온 사람 입장에서 너무 기초적인 사실이라 "아직도 이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언제나 어떤 분야나 '뉴비'들은 유입된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으니까. 전문가보라고 쓰는 것 같았던 내 사수의 기사가 재미없었던 이유는 그게 아니었을까.


종종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참 눈이 밝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 맞아 저런게 궁금하겠구나 하는 것들. 흐려진 내 눈에는 이제 보이지 않는 것들. 전현무 씨 그림의 색채가 신선한 이유도 그런 것 같다. 정형화된 전문가들이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보여주니까. 사실 많은 회사에서 그 '눈'을 빌리려고 인력과 비용을 들여 새로운 사람들을 자꾸 찾는 게 아닌가. 고인물들의 성숙함만큼, 새 물의 풋풋함도 필요하다. 그런데 그 풋풋함이 능력을 발휘하려면, 고인물들의 관대함이 위축된 새물의 어깨를 먼저 펴줘야 한다. 새물에게는 회사에 온통 낯선 것들 뿐일테니까.


사수는 다른 곳으로 이직을 했다고 했다. 기자는 아니라니, 그 역시 처음 발을 내딛는 새로운 세계에 간 것이다. 이제 그에게도 초심자의 능력이 생겼을텐데. 그에 대해 알고 계실까? 부디 이제라도 그 능력을 잘 이용하고 계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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