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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리피언 Aug 04. 2022

살림은 장비빨

엑셀 팡션 같은 우리집 이모님들

나는 매 끼니 새 밥을 먹이지 않은 때가 없었다


후진 주말드라마 속 고부갈등의 주인공인 시어머니들에게서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대사다. 막 지은 따끈따끈한 새 밥을 먹이는 것이 엄마들의 자부심이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햇반이 가마솥 갓지은 밥보다 맛있다는 시대다. 이불 몇 채, 금, 그릇으로 구성되던 혼수도 삼대 이모님을 모시는 것으로 대체되고 있다. 빨래건조기,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는 이제 없어서는 안되는 생활가전들이다.

남편보단 못하지만 나보단 잘하는 우리집 설거지머신by 슬리피언

그런데 종종 옛 향수에 손빨래, 새밥 같은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인은 최근 삼대 이모님을 다 들였더니 남편이 농반진반 "그럼 너는 왜 있어?"라고 했다길래 "형부 간 크시네"라며 웃은 적이 있다.

전업주부가 설거지, 빨래, 청소를 꼭 자기 손으로 해야한다는 법은 없지 않나. 청소, 빨래, 설거지 말고도 집안에는 할 일이 천지다. 기기의 힘을 비는 것이 본인에게도 여유있는 생활을 선물한다는 것을 이제는 형부도 알고 있기를 바란다.


직접 지은 새밥이 주는 그 몽글몽글한 마음은 나도 안다. 하지만 이제 가전이 집안일을 하는데 익숙한 새 세대에게 매끼 세밥, 손빨래, 손설거지 같은 건

김 대리 엑셀 팡션?사용하지 마세요

처럼 고루한 참견처럼 들리니 쓸데 없는 갈등 유발 요소가 되는 것이다.

3대이모님이 계셔고 집안에는 할일이 천지다.픽사베이

워킹맘 시절 나는 종종 집안일 전문가가 집에 하나씩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하면서 나와 아이들까지 챙기면서 집안일까지 잘하는 것은 나에겐 무리였다. 회사에서 지쳐 들어와 애들 먼저 껴안아주고 싶은데 밥해 먹이고 나서 어지러져 있는 집을 보면 정말 다 놔버리고 싶은 적이 많았다.


사람이 두 가지 역할이 힘든 것은 나만은 아닌 모양이다. 최근 남편이 이직하면서 생긴 공백에 전업주부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한 선배는 내게 "한 사람이 집을 전담마크 하니까 생활이 훨씬 윤택해"라며 남편이 다시 취업을 하면 아쉬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저출산의 이유 중 하나가 일하면서 애 키우기 힘들어서라면, 내 경우에는 학교에 일찍 오라는 것 보다는 가사도우미 비용 지원이 더 솔깃한 정책이 될 것 같다. 아이는 내 손으로 키우고 싶지만 집안일은 누가 좀 해줬으면 좋겠었으니까.


워킹맘이었을 때도, 전업주부일 때도 나는 우리집에서 플레이어보다는 매니저로서 움직일 때가 더 많다. 그래서 장비 없이는 힘들다. 전업주부도 플레이어 겸 매니저로서 살기는 힘들다.

그래서 세 이모님이 얼마나 든든한 살림 지원군인지 모른다.


똥기저귀 빨래, 새밥, 광이 나는 유기그릇 이 모든 것을 손으로 해내시던 우리의 어머니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우리의 윗세대, 윗윗세대에서 나는 웃음, 기쁨의 표정보다는 삶의 무게에 눌린 표정을 더 많이 기억한다. 장비빨을 세워 평화와 웃음이 함께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앞으로도 이모님과 함께하기 위해 지갑을 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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