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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리피언 Aug 08. 2022

엄마, 솔직하면 안돼?

솔직함의 칼날에 다른 사람이 다치면 안돼

둘째는 어릴 때부터 별났다. 세 살쯤부터는 말을 참 잘했는데 어느 날은 선생님이 "어머님, 우리 XX가 소풍 나가는 길에 '선생님, 햇살이 정말 예쁘지 않아요?'라고 하더라고요"라며 꿀이 뚝뚝 흐르는 눈빛을 보여주셨다.


그런 날만 있으면 좋겠지만, 나를 당황시킨 날도 적지 않다. 여섯살이던가 어느 날은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막 쫓아가길래 뭔가 싶어 따라서 달려갔더니 처음 보는 아저씨를 붙잡고 "아저씨, 담배에는 백 몇 가지나 되는 유해성분이 들어있어서 어쩌구저쩌구... 지금 끊으셔야 오래 살 수 있으니 끊으셔야 돼요"라는 말을 떠들고 있어서 정말 백배사죄를 드리고 아이 손을 잡고 끌고 오기도 했고(그 무렵 어린이집에서 금연교육을 했다고..그래도 아저씨가 당황한 눈빛이시긴 했지만 아이에게 '그렇구나, 고마워' 해주셨다. 감사하다),

비슷한 나이 무렵,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계산하는데 "엄마 술에는 어쩌고 저쩌고가 들어있어서 어쩌고 저쩌고"해서 사장님과 나를 민망하게 만들기도 하고(어린이집에서 음주 관련 교육을 했다고...), 어느 날은 누나랑 심부름 나갔다가 "얘들아, 교회다니니?"라고 묻는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아줌마, 저는 예수님이 있다는 증거가 없어서 못 믿는데 아줌마는 그걸 어떻게 믿어요?"라며 질문 공세를 퍼부어서 아줌마가 도망가게 한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어린이집에 무슨 심사를 위해 공무원이 나왔는데 "와, 저 아줌마 정말 못생겼다"고 말했더니 애들이 우르르 "와, 정말 그렇네", "아줌마 뚱뚱해요"라고 거들어서 선생님들이 애들을 진정 시키느라 진땀을 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다시 백배사죄를 하기도 했다.

사실 결정타는 1학년 때였는데,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방 개수가 우리집보다 적다고 "니네 왜이렇게 작은 집에 살아? 돈 없어?"라는 말을 해서 정말 진땀을 뻘뻘 흘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같이 있었는데 내 사과를 친구 엄마가 너그럽게 받아주긴 했지만, 정말 너무 미안했고, 지금도 너무 미안하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아이가 늘 생각하는 그대로를 말하도록 놔두는게 그닥 좋기만 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실수한 이후로 한 일주일 정도, 그 부분을 조심시켰더니 "엄마, 알겠으니까 그만하면 안돼요?"라는 애 말에 넋이 나갔다가 결국 내가 찾은 건 책이었다. 역시 다행인지 불행인지, 얘만 그러는게 아니어선지 유아 도서 중에는 '솔직하면 안 돼?' 같은 책들이 나와 있었다. 녀석은 내가 왜 이런 책을 사 읽히는지 아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책은 잘 읽어주었고, 그 뒤로는 적어도 내가 있는 곳에서는 저런 큰 실수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2학년 때쯤 받은 놀이치료는 이 부분 때문에 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부분에도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우리 아이 말고도 생활지능, 눈치라고도 불리는 사회성이 떨어져서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이 많다. 이 아이들이 머리가 나빠서 그럴까? 오히려 반대의 경우도 많다. 지능이 월등하게 좋은 친구들 중 사회성이 떨어지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재아들 특징이 좋아하는 것에 과할 정도로 몰입한다는 건데, 문제는 여기 몰입하면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말하자면 주위의 반응, 듣는 사람의 기분 같은 것 말이다), 그냥 입밖으로 뱉어버리는 것이다.

의외로 원앙 두마리가 같이 있는 사진이 많지 않긴 하다. 픽사베이

이상한변호사우영우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상대 부부의 금슬이 보기 좋다며, "원앙 같다"고 얘기하는 상사에게 "사실 원앙은 그렇게 금슬이 좋지 않습니다"라며 팩트 폭력을 가해버리는 것. 사실 안하면 더 좋을 이야기를 해버려서 갑분싸를 불러오는 머리 좋은 녀석들이 우리 주변에도 심심치 않게 있다.

  

물론 아이가 말을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한다고 해서, 그것 말고도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해서 차별받거나 따돌림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아직도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자칫 때와 장소를 가려 말하라는 교육이 해야할 말마저도 속으로 참는 아이가 되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종종 아이의 특별함에 빠져 아이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맺지 못하는 것을 "우리 애가 머리가 좋아서 그래"라며 회피하는 부모들을 보면, 걱정이 많아진다. 본인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과 본인 솔직함에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 이 부분을 다듬어주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방관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머리가 좋건 어쨌건,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당신의 동료 중 어른인데도 솔직함을 무장해 다른 사람을 상처입게 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내 아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게 괜찮은 게 아니라면, 이런 부분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외면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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