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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리피언 Aug 19. 2022

퇴사 계산서

퇴사할 결심했다면 준비하세요

잘 계산해, 밖은 정말 지옥이야

첫 직장을 먼저 그만 둔 선배와 오랜만에 만난 저녁자리였다. 선배가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대사를 따라했다. 나 역시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하자 한 말이다. "계산 잘하고 퇴사 준비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돈이 들더라고." 선배는 일을 그만두고 좀 쉬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다른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퇴사 계산서를 잘 못 준비한 탓이라고 했다.


그럼요, 잘 준비해야죠.

말은 그렇게 했는데, 아, 내가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나왔구나. 결국 퇴사를 하고 나와서야 선배가 잘 알아보라고 한 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았다.

역시 가장 큰 계산 실수는 돈이었다.


직장에 있을 때, 우리는 대체로 세후 연봉에 관심이 많다. 세전 연봉에서 이것저것 떼고 나면 얼마를 받는지, 내가 당장 얼마나 쓸 수 있는지가 중요하니까.


그런데 퇴사할 때, 특히 4대보험을 떼는 정규직으로 일했다면 세전 연봉을 잘 살펴봐야 한다. 세전 연봉과 세후 연봉 차이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퇴사한 후에 본인이 직접 내야할 돈이 많다는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포기하는 돈이 생각보다 많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퇴사 후 건강보험을 직접 내야 하는 지역가입자로 전환되는 경우라면 첫 고지서를 받고 깜짝 놀랄 수가 있다(이런 문제 때문에 지역가입자 보험료를 낮추는 것 같긴 하다).


나는 첫 퇴사 후 알바를 하게 됐는데, 프리랜서였지만, 하는 일 치고 대가가 괜찮은 일이라 덥썩 물었다. 얼마 뒤 소득이 생겼다고 지역가입자 전환이 됐는데 건강보험료가 30만원이 넘게 나왔다. 소득은 크지 않았지만, 집이 나와 남편 공동명의였는데 재산 항목 때문에 건강보험료 기준 점수가 대폭 오른 모양이었다. 정말 계산에 없던 일이었다. 그런데 또 재산세 뭐 이런 거에선 공동명의가 이득이라니 역시 세금은 참 어렵고 복잡하다.


국민연금도 그렇다. 나는 특별히 노후 준비를 한 게 없어 국민연금을 최저수준으로라도 유지하기로 했는데 회사에 다니면 회사가 반을 내주지만 개인 자격으로 유지하게 되면 오롯이 내가 내는 돈만 적립된다. 왠지 맞는 것 같으면서도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게 된다.


회사 다닐 때 우리 회사 복지는 정말 쓸게 없다고 많이 투덜거렸는데, 그래도 나오고 보니 그냥 울타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라는 걸 알게 됐다. 일년에 몇 번 쓰지도 못하고 시설도 별로라고 했던 리조트 이용도 막상 내 돈 내고 하려니 두 배 가량 비싸다. 회사가 나름의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회사를 나오고서야 처음 알았다.


그럼 나는 퇴사를 후회하는가.


그럼에도 퇴사를 후회하지는 않았다. 첫 직장 때는 안 맞는 일 때문에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고, 만성 장염에 갑작스런 알러지 반응 등으로 병원 신세를 지는 날이 많아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화내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정말 잘 살려고 회사를 떠난 것이었.

아마 그래서 더 계산 없이 울타리를 넘어 도망갈 생각부터 했던 것 같다.

퇴사계산서에 마이너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플러스되는 항목도 있다. 나는 외식보다 집에서 더 많은 음식을 해먹고 있고, 나가지 않고도 집에서 시간을 잘 보내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집에서 운동도 하고, 커피도 내리고, 새로운 음식도 만들어본다. 병원비와 운동에 들어가던 비용이 줄었다.


무엇보다 일 스트레스 때문에 필요도 없으면서 충동적으로 지르는 시발비용이 대폭 삭감됐다.


혹시 다른 일을 찾을 생각이 있다면 직업 훈련 지원 등을 찾아 많은 비용을 내지 않고 자기계발(뭐 이런것도 가능하고)을 할 수 있는 길도 있다. 이런 건 돈은 아니지만 스스로에게 플러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번 퇴사 후에 운전을 배웠다(이건 마이너슨가).


처음 퇴사를 할 때와 그 직후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면 마치 퇴사가 인생에 한번 있을 일처럼 놀라고 당황하고 좌절하고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첫 퇴사 이후에도 나는 입사와 퇴사, 아니 계약과 재계약을 통해 몇 년 더 경제활동을 했다.


퇴사를 하면 입사도 가능하다. 그러니 너무 입사와 퇴사가 인생의 큰 획을 그을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 없다는 것도 퇴사를 통해 배웠다. 그리고 이 일을 반복할수록 나의 퇴사 계산서도 조금씩 더 정밀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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