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져서야 보인 것들, 해외에서 엄마로 산다는 것

각성의 시간이될줄 누가 알았을까

by 쑝쑝


정신없었던 해외 이사

정말 말 그대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해외 이사는 국내 이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인데, 너무 과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되겠지’
라는 말도 들었지만,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있었고

영어권도 아닌 나라로 가는 만큼, 최대한 철저히 준비하고 싶었다.

국내 이사는 짐을 챙겨 바로 새 집에 들이면 되지만,
해외 이사는 모든 물건을 꼼꼼히 포장하고,
장시간 컨테이너에 실려가는 동안 망가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게다가 현지 세관 문제까지 감안해야 했다.

다행히 친정의 도움으로 아이는 걱정 덜 수 있었고,
나는 짐과 한국에서의 생활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짐을 보내고, 공항에서 눈물바람으로 이별한 뒤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코로나, 그리고 적응이라는 이름의 혼돈

낯선 나라에 발을 디딘 직후,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쳤다.
거의 ‘밖에 나가면 감염된다’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도착하자마자 나는 육체보다 정신적으로 마비되었다.

병원, 약국, 마트처럼 꼭 필요한 곳 외에는 외출이 금지되었고
아이 역시 등교하지 못한 채 온라인 수업에 들어갔다.

현지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신랑은 회사 일로 바빠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심지어 신랑 회사에서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까지 발생하면서
걱정과 불안, 우울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나마 5개월쯤 지나니 방역 규제가 느슨해져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손녀

아이를 오랫동안 키워주신 부모님은
아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다.

매일같이 통화하지 않으면 섭섭해하셨고,
온라인 수업 중 쉬는 시간을 전화를 걸 시간으로 여기셨다.

하지만 그 시간에 아이가 스스로 쉬고 싶어 하거나
다른 일정이 있는 경우도 있었기에 나로서도 마음이 복잡하고 불편했다.

전화를 끊을 때마다 들리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내일 또 전화할 거지? 할아버지는 그거만 기다리고 있어.”
“얼마나 기다리는지 모른다. 얼른 전화 좀 해라.”


일요일엔 신랑도 집에 있었기에
전화가 오면 ‘지금 꼭 받아야 하나’ 고민될 때가 있었다.
나는 어떤 일을 하던 중이라도 그 전화를 받는 게 마음 편했지만,
신랑은 "나중에 천천히 드리면 안 되냐"며 핀잔을 주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자기 주도성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랑이 야속하기만 했다.


떨어져 있음의 미학

그럼에도 물리적 거리와 시차는 묘하게 나를 편안하게 해줬다.
자주 만나지 못하고, 오래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 오히려 나았다.

가끔 한국에 가기도 했고, 부모님이 이곳에 오시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짧은 만남’은 서로를 애틋하게 해주었고
작은 갈등은 대부분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나는 상황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나’라는 자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라진 나는,
4년의 해외생활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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