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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유 Sep 27. 2019

아메리카나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출처: 민음사 홈페이지

 *두서없음과 스포일러 주의* 


나의 정체성과 <아메리카나>


  <아메리카나>를 읽으면서 나와 너무 다른 주인공에게 나를 대입했다고 한다면 기만일까? 내 안에서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도 조금씩 샘솟는다. 난 아시아인 여성이다. 교환학생으로 미국이 아닌 캐나다에 왔고, 따라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연이다. 이곳에서의 네 달은 삶이 아니라고 하기는 긴 시간이지만 체감상 여행에 더 가깝다. 반면 <아메리카나>의 주인공 이페멜루는 아프리카인이고, 그에게 미국은 삶이다. 이페멜루는 더 나은 삶을 위해 20년을 넘게 산 나이지리아를 떠나 공부를 하고 생계를 이어나간다. 여행에 훨씬 가까운 삶과 삶을 위한 여행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캐나다의 아시안과 미국의 흑인 사이의 갭도 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자꾸 이페멜루와 나를 동일선상에 놓게 되었는가? 그것은 주류 사회에 있다가 비주류가 되어 본 경험 때문일 것이다. 이페멜루는 나이지리아에 사는 동안 자신이 '흑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미국 땅에 떨어지자 마자 나이지리아인이 아닌 '흑인'이 된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로부터 '우리나라는 단일민족 국가다'라는 허구를 주입받았다. 이페멜루와 세대가 달라서인지, 나는 그놈의 '민족'을 끊임없이 주입받으며 세계적으로 '한민족'이 얼마나 우수한지를 주변 어른들과 때로는 공교육기관에서 학습해야 했다. (도덕책의 김연아와...김기덕...(?!) 사진을 보면서) 그러나 2008년 미국의 한 여름 캠프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나는 South Korea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깨달았고, 2019년 토론토에서 백인들은 내 얼굴과 인도계 여성 얼굴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백인 위주의 나라에 떨어진, '유색'인종 여성이라는 점이 나와 이페멜루를 한 데 묶어 줬다. 이페멜루가 힘든 시기를 견뎌내고 블로그를 운영하기 시작했을 때는 그 통렬함에 쾌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언젠가부터 이페멜루에게 미국 생활의 애환은 조롱거리가 되었고, 나는 그런 전복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언젠가 함께 교환학생을 온 언니가 '내가 소수자로 태어나서 다행이야. 백인 중산층 남성으로 태어났다면 평생 이런 세상을 몰랐을 거 아니야?'라는 말을 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내가 느끼는 것과 이페멜루가 느낀 것은 분명 결이 다르고 차이가 있을 텐데도 그 안에서 모종의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이. 또한, '유색인종', 혹은 여성으로서의 발화마저 백인과 남성(여기서 '남성'은 백인이 꼭 아니라도, xy염색체를 가지고 스스로 남성으로 정체화한 모두를 뜻한다.)들은 검열하려고 든다는 점에서. 그래서 난 이 책을 미국 주류 사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했다. (반응은 뜨거웠던 걸로 알지만, 솔직한 내면의 반응 말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자신이 왜 약자가 아니라 강자인지 설명해 보라던 한 남성과의 대화와,  작은 실수를 해 놓고 '이런 식으로 말하면 너무 racist 같나요?' 라며 너스레를 떨던 백인 미국인 하나가 떠올랐다. 


이페멜루의 머리카락


  이 소설에서 주된 화두가 되는 부분은 이페멜루의 헤어스타일이다. 옮긴이는 옮긴이의 말에서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헤어스타일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고 썼지만(그도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지만, 이 문장은 불필요했다고 생각해서 옮겨 본다.)

  헤어스타일에 대한 <아메리카나>의 논의는 누군가의 눈에는 별 게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은 이페멜루의, 흑인 여성의, 넓게는 여성 전체의 삶을 좌지우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페멜루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에 의해 찰랑거리는 머릿결에 대한 동경을 안고 자란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프로페셔널'해 보이기 위해 탈모 직전까지 자신의 두피와 두발을 혹사시켜야 했다. 그러나 흑인의 있느 그대로의 머리카락은 어째서 프로페셔널해 보일 수 없단 말인가? 프로페셔널함은 능력으로 증명해 보여야 할 문제인데 어째서 머리카락으로 판단당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이페멜루의 상황은 내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아마 어떤 여성들에게도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르바이트했던 한 대형 마트에서는 머리가 긴 여성 직원들이 머리망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메이크업은 필수였고, 몇몇 직원들은 염색한 두발의 색이 너무 튄다며 다시 염색해 올 것을 강요받아야 했다. 일터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피부, 몸매, 화장법, 옷차림 등 온갖 부문에서 여성들은 검열당하고 '나다움'을 잃는다. 물론 규범이 범벅된 이 사회에서 진정한 '나다움'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여성으로서의 나는 남성보다 더 많은 방식으로 자아를 억압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뿐만 아니라 장애인, 성소수자, '유색'인종 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은 최대한 정상성에 가까운 모습, 혹은 강자 중심의 사회가 짜맞춰 놓은 규범에 걸맞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가꿔야 한다. 

  그러나 억압이 자신을 괴롭히는 상황에서도 커뮤니티를 통해 자신과 같은 상황에 놓인 흑인 여성들을 만난 이페멜루는 릴랙서를 더이상 사용하지 않고 생머리를 유지하기 시작한다. 생머리를 자신에게 걸맞는 방식으로 행복하게 가꾸기 시작한다. 공교롭게도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역시 공식 석상에서 릴랙서를 사용하지 않고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페멜루가 자신의 머리카락 때문에 고뇌하고 끝내 자신의 개성을 찾아가는 여정은 외적/내적으로 받았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용기를 주는 듯했다. 


본의 아닌 경험이었지만


  소설은 이페멜루가 고향 나이지리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미국 생활을 청산한 뒤 머리를 땋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야기는 이페멜루의 과거와 머리를 땋고 그 뒤의 여러 사건들을 겪는 현재가 교차되며 진행된다. 그리고 중간중간 이페멜루의 첫사랑인 오빈제의 이야기가 삽입된다. 이페멜루가 미국으로 떠나고 우울증을 경험하면서 두 사람은 멀어지고, 시간이 흐른 뒤 오빈제는 영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나 강제추방당한다. 나이지리아로 돌아와야 했던, 혹은 나이지리아를 그리워 했던 두 사람이지만 막상 나이지리아에서 그들은 고국의 모순들을 목도한다. 결혼을 최우선의 덕목으로 삼는 분위기와 미국, 영국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억압당하는 여성들, 개발도상국의 난개발 등을 말이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이 다시 이어짐을 암시하는 방향으로 소설이 마무리되었을 때, 나는 작가와 함께 어디서든 나은 세상을 꿈꾸기로 마음 먹었다. 우리는 책과 영화를 통해, 혹은 비행기를 타고 낯선 땅에 발딛으면서 낙원이 아닌 세계 곳곳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경험들이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약간은 공허한 희망을 품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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