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토론토의 무기력에 대처하기

올 것이 왔다

by 권유
학교에서 갑자기 동판화 파는 시장 같은 게 열렸다. 레이디가가의 Joanne 앨범을 좋아해서 골랐다. 침대 머리맡에 잘 붙어 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은 되지만...


이상하게도 굵직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 있다. 작년의 일이다. 심각한 대2병(이라는 말로 미화된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고 있던 나는 10월만을 기다렸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달이었기 때문이다. 지겨운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다른 대학으로 학점교류도 가는 등 온갖 시도를 다 했으나 피폐해져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던 내게 부산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수업시간에 영화 티켓팅을 하고, pc방에서 관객용 숙소를 잡으며 하루하루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게 가게 된 부산에서의 둘째날에는 태풍이 몰아쳤고, 숙소의 카페에 앉아 교지 일을 하며 영화보다 스펙터클한 태풍 구경을 하던 나는 생각했다. 몸이 일상에서 도망친다고 마음마저 그 짐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실 딱 그 시점에 한 생각은 아니었을 거고 서서히 한 생각일 테다. 의학에서 문학으로 전향한 순간에 대한 전설이 있는 루쉰처럼 내 전설을 만들고 싶었던 내 발악이다.)

그래서 교환학생을 오기로 했을 때도 걱정을 좀 했다. 교환학생 자체는 새내기, 아니 고등학생 때부터 계획하고 있었지만 막상 신청시기가 다가오자 목표가 아니라 기회처럼 느껴졌다. 교환학생을 지원해서 떠나는 절차는 생각보다 그리 까다롭지 않았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에 가 있는 상상을 하는 것도 기분이 정말 좋았다. 교환학생 지원을 앞두고 있던 2학년 2학기 말에는 하루가 다르게 잘 알지도 못하는 도시의 풍광 속에서 웃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마거릿애트우드 좋아, 토론토에 가자. 호주에 가서 서핑을 하자. 비엔나 가면 비엔나 커피는 그냥 마실 수 있을까? 아, 미국도 한 군데 쓸까. 이런 것들이 주된 의식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흐뭇한 상(망)상 속에 빠져 있다가도 부산에서의 감각은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거기 간다고 괜찮겠어?

나는 더러운 걱정과 감각을 두더지 잡듯이 밀어 넣었다. 토론토에 가는 게 결정되고 나서는 신나게 (예산에 대한 걱정이 부족한) 여행 계획을 짰다. 애써 밝은 쪽만 봤다.

하지만 정신 없는 적응기가 끝난 9월 말의 어느 날, 나는 인정해야 했다. 내 오래된 친구인 무기력과 우울이 내 안에서 또 스멀스멀 기지개를 켜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난 아무 데도 가기 싫고, 아무 것도 하기 싫고, 이 육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것을.


나의 일부를 꺼내 놓기


처음으로 무기력과 우울을 느낀 건 언제였을까?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흐릿하게 그 안에 있는 내 모습들이 떠오른다. 고등학생 때? 중학생 떄? 어쩌면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부터인지도 모르겠다. 무기력과 우울은 오랫동안 내 옆에 있으면서 내 성장을 지켜봤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무기력한 내가 공부에 방해가 되니까 스스로에게도 숨기려고 했던 것 같다. 우울한 나는 즐기는 편이었다. 일기장에 아주 내밀한 이야기들을 쓰고 그 안에 오래 머무르려고 했던 내가 떠오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주 친한 친구들이야 그럴 때마다 티가 나니까 무슨 일이 있냐, 힘드냐 묻곤 했지만 타인에게 그런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 안에 무기력과 우울이 있음을 타인 앞에서도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꺼내놓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와서부터였다. 십대시절보다 자유로운 분위기 덕인지 술자리 덕인지 몰라도 친구들은 자신의 내면을 꺼내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술 없이도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들이 많아졌다. 친구들의 내면은 나를 거울로 비추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친구들과의 대화는 '현대인의 대부분은 우울증을 앓고 있다.' 같은 기사의 건조한 문장보다 훨씬 와닿았다. 그렇게 난 내 안에 기쁨과 사랑, 성취감이 있듯 무기력과 우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적인 플랫폼에(그렇게 영향력 있는 곳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다.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교환학생을 갈 누군가는 이 글을 읽을 텐데 장소의 변화가 내면의 변화를 보장하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내가 한국에 향수를 느끼거나(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요크대가 낙원이 아니라서(실제로 낙원은 아니지만)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건조한 말투로 나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어두컴컴하고 내밀한 영역 안에 있던 나의 일부에 볕을 쬐어 주고 싶었다.

물론 한국이랑 완전히 같은 마음가짐은 아닌 듯하다. 여기서는 깊은 우울은 잘 느끼지 않는다. 주로 축 쳐지고 가만히 있고 싶어 하는 내면과 그러면 더 힘들 것을 알아서 움직이고 싶어 하는 내면의 갈등을 많이 느낀다. 확실히 고민의 층위가 얕아지고 가짓수도 줄어서 그런지 부정적인 감정들이 가벼워지긴 했다. 그러나 '나'는 본질적으로 '나'라서 고민거리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물론 실존하는 고민들도 있지만!) 이러한 성질은 무기력과 우울은 완전히 박멸될 수 없고, 미워하기보다는 잘 달래서 같이 살아야 하는 친구인가보다 하는 깨달음을 줬다.


암울한 친구들 달래기


잘 달래서 같이 살아야 하는 친구, 들을 어떻게 달래려고 하고 있냐면, 한국이랑 그렇게 다르진 않다.

일단 운동.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운동하려고 시도는 해 보지만 항상 꾸준히 하기는 실패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난학기에 휴학을 하고 시간과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거의 매일 조금이라도 운동을 하게 됐다. 지금은 휴학시절보다도 운동을 많이 하는데(넘치는 게 시간이니까), 보통 체육관에 한 번 가면 두 시간 정도는 그냥 보내고 오는 편이다. (그렇다고 엄..청 열심히 운동을 하지는 않는다. 설렁설렁 하는 편.) 이 글을 쓰는 시점을 포함, 운동을 마치고 따뜻한 물에 샤워한 뒤에는 없던 활력도 생기고 기분도 훨씬 좋다. 돌아가도 운동..열심히 하겠지?

한국에서처럼 책이나 영화를 보려고 한다. 고등학교 때는 읽으면 오히려 우울 그 자체가 되는 그런 책들을 좋아했는데, 대학 이후에는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것 같다. 어떤 때는 힘든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해 둔 책들이 더 힘을 주기도 한다. 영화는 한국에서보다는 많이 못 보고 있다. 넷플릭스는 왓챠에 비해 영화가 안 그래도 별로 없는데, 캐나다 넷플릭스에는 자막이나 콘텐츠의 종류 등에 있어서 좀 더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분이 이상할 때 '영화나 볼까?' 라는 의문문이 불쑥 튀어나올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글을 쓴다. 브런치는 사실 나와의 약속 같은 느낌이라 기분을 컨트롤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고, 보통 일기를 쓴다. 너무 힘든 날에는 일기를 스킵할 때가 더 많은 느낌이지만, 아주 먼 과거부터 해소되지 않는 감정이 있다면 일기를 쓰곤 했다. 거의 매일 일기를 쓰던 고등학교 때는 일기를 쓰는 연도와 상관 없이 일기장 한 권을 끝까지 쓰려고 했다면, 대학에 온 이후로는 그런 식이라면 4년 동안 다이어리 한 권만 쓸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1년에 한 권씩 일기장을 바꾸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건 고등학교 때 은사님이 런칭한 문구 브랜드에서 나온 멋진 노트다. 창의적인 에너지가 가득한 이 다이어리에 우중충한 내용들이 끼어 드는 건 제품에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잘 쓰고 있다. 한국에서는 워드를 켜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뭉텅이 말들을 쏟아낼 때도 있었는데, 여기서는 삶이 좀 더 풍요(?)로워서 그런지 그런 일은 잘 없다.

그리고 토론토에 애착을 더 가져 보려고 하고 있다. 이곳의 높은 하늘과 느림과 그래도 와이파이는 잘 터지는 인프라와 다운타운의 벽돌색이 좋다. (업타운 미안..)

그 외에 맛있는 거 먹기, 먹을 거 생각하기 등이 있지만 얘들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런 때 생각나는 먹거리들은 먹고 나면 오히려 불쾌하게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파인애플은 여기서 제외한다. 파인애플은 최고니까. / 하지만 초콜릿 없인 못 살아 정말 못 살아.)


결론


- 나는 나로부터 도망칠 수 없고, 세상 어디에도 천국은 없으니까 남은 시간 잘 해 나가 보자.


는 것이다.


오늘의 트리비아

-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오전 일진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다. 오후는 좋았다.

- 팀홀튼 시나몬롤 맛있다.

- 시나몬롤도 먹고 브라우니도 먹었더니 설탕이 질린다. 내일은 담백한 음식들을 먹어야지.

- 토요일에 쿠바로 출국한다. 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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