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위해 뉴욕으로 출발하기 전날 토론토에는 첫눈이 왔다. 비록 비가 섞인 눈이었지만 첫눈은 설렜다. 본의 아니게 보스턴에서 '보스턴의 첫눈'을 맞고(사뭇 공격적이었다) 토론토에 돌아왔을 때 나는 여행을 했던 6일 동안 너무 달라져 있는 토론토의 눈 쌓인 풍경이 이상하기도 하면서 좋았다. 그 후로는 다시 날씨가 풀려서 내린 눈도 녹더니, 12월이 되자마자 거의 우박과 같은 단단한 눈이 시끄럽게 쏟아져 내렸다. 그러고는 요즘 토론토에는 며칠에 한 번씩 눈이 조용히 쌓인다. 눈이 오는 토론토는 추운 듯 포근해서 좋다. 눈의 고장에 온 기념으로 눈에 대한 글을 써 보려고 한다.
고향에서
내 고향은 경상남도 진주다. 이렇게 말하면 어딘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부산 옆옆옆이다. 한반도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도시다 보니 눈이 그렇게 자주 오지 않았다. 진주에 토론토만큼 눈이 왔다면 아마 도시가 마비됐을 것이다. 태어나고 나서의 내 기억에 진주에 눈이 쌓이도록 왔던 건 두세 번 정도였던 듯하다. 초등학교 때는 그런 적이 하여튼 거의 없고, 중학교 시절이 기억에 남는다. 중2 때였는데 학교에 있는 동안 웬일로 눈이 쌓였다. 선생님들은 수업을 빼고 우리가 밖에서 놀게 해 주셨고, 몇몇 선생님들은 등교할 때 학생들이 냈던 휴대폰을 사진을 찍으라며 돌려 주시기까지 했다. (우리 선생님은 안 그러셨다. 아이들의 큰 원한을 샀다.) 우리는 쓰레받기를 바깥에 가지고 나가서 눈을 가득 퍼담았다. 그렇게 많이 내린 게 아니라서 운동장의 모래가 다 섞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장갑도 아무도 없어서 맨손으로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이나 추위 때문에 장갑을 낄 일이 잘 없었던 내 입장에서는 장갑의 필요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왜 눈사람을 만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다음날인가 눈이 또 와서 휴교를 했던 기억이 난다. 즐거운 시절이었다.
고등학교는 경북 안동으로 진학했는데, 그곳은 강원도랑 가까운 데다 내륙지방이라 칼바람이 불고 이따금 눈도 내리는 곳이었다. 눈이 자주 오지 않던 고향에서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눈이 올 때마다 일부러 걸을 때 눈이 있는 쪽을 밟기도 했다.
서울에서
이상한 경험을 했다. 작년 2학기, 기말고사를 얼마 안 남긴 시점이었을 것이다. 난 한 손에 노트북 가방을 들고 다른 쪽 팔에는 숄더백을 맨 채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바람이 나를 따라 역사 안으로 들어왔고, 거기엔 얄팍한 눈송이들이 섞여 있었다. 한숨부터 났다. 이렇게 짐이 많은 날 눈이라니. 생각만으로 섬찟했다. 눈이 왜, 뭐 어때서?
그러고 보니 서울에서 눈은 지저분하게 느껴지기 일쑤였다. 난 잿더미처럼 내리는 눈을 보고 한숨을 쉬며 버스에 올라 탈 때가 많았다. 눈이 오는 날이면 양쪽 팔에 가득 든 짐에다가 우산까지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날 언제나 불쾌하게 했다. 지하철 역에서 섬찟한 생각을 한 그날, 난 학교에 가는 지하철에 운 좋게 앉아 멍하니 생각했다. 눈이 짐스러워지다니. 내 인생은 정녕 망한 거야. 아주 지친 순간들이면 인생에서 날 기쁘게 해 줬던 무언가들조차도 한순간 적대시할 수 있게 됨을 생각하게 된 시기였다. 동시에 그만큼 내가 지쳐 있다는 사실에 힘이 들기도 했다.
토론토에서
눈이 오던 요 며칠은 업타운이든 다운타운이든 캠퍼스든 동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캠퍼스 잔디밭에 눈이 잔뜩 쌓이자 눈이 부셨다. 로렌스 역 일대의 지붕에 하얗게 눈이 앉아 있는 게 다른 동네 같았다. 기온이 낮아져 하늘에서 모인 수증기가 얼어서 내렸을 뿐인데 세상이 달라보이는 경험이 재미있다. 아무래도 여기에서는 서울에서 가지고 있던 조바심이나 내 양팔에 잔뜩 얹혀 있던 짐이 없어서 더 그런 것도 같다. 조용히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있으면 마음도 차분해진다. 더워서 마음이 찐득할 때는 절대 안 들을 것 같은 겨울 느낌의 발라드(예컨대 김동률)도 듣고, 티파니영이 지난해 발매한 크리스마스 시즌송인 'peppermint'를 들으며 의식적으로 페퍼민트 차를 마시기도 했다. 친구 하나가 합창 공연 때문에 서울에서 첫눈에 대한 노래를 연습했다는데 그것도 생각했다. (제목은 기억 안 난다) 그러다가 신이 나고 싶으면 캐롤 앨범도 찾아 듣고. 날씨 덕분에 신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이제 토론토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니까 더 실감이 나는 것 같다. 토론토가 추워지고 눈이 와서 내가 떠날 날이 다가온다는 건 곧 익숙한 서울에서의 삶이 기다린다는 것과도 같으나, 한편으로는 언제 이런 여유를 다시 느낄 수 있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메시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때 여유를 많이 즐겨 놔야지. 페퍼민트 차를 마시면서.
하여튼 눈 좋다. 서울에 가서도 좋아하려고 해 볼 것이다.
오늘의 트리비아
- 사실 내일 시험 있다. 왜 이렇게 여유로운지 모르겠다.
- 좋은 일만 생각해야겠다.
- 이 매거진에 더 쓸 글이 없어지면 이 브런치는 어떻게 될까
- 공부하기 싫은 틈틈이 김영하 <여행의 이유>를 읽고 있는데, 좋은 말이 많다.
- 오랜만에 열심히 읽은 시집도 생겼다. 송승언의 <철과 오크>를 지하철에서 틈틈이 읽었다. 나름 오기 전에 선물 받은 시집인데 이제야 펴보다니. 시들은 심오한데 자꾸 돌아보게 하는 그런 게 있다. 해설을 잘 읽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