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눈 이야기

요즘 눈 내리는 토론토

by 권유
기숙사가 있는 Glendon Campus 입구의 나무들. 잎사귀 위에 눈이 많이 쌓였다.



여행을 위해 뉴욕으로 출발하기 전날 토론토에는 첫눈이 왔다. 비록 비가 섞인 눈이었지만 첫눈은 설렜다. 본의 아니게 보스턴에서 '보스턴의 첫눈'을 맞고(사뭇 공격적이었다) 토론토에 돌아왔을 때 나는 여행을 했던 6일 동안 너무 달라져 있는 토론토의 눈 쌓인 풍경이 이상하기도 하면서 좋았다. 그 후로는 다시 날씨가 풀려서 내린 눈도 녹더니, 12월이 되자마자 거의 우박과 같은 단단한 눈이 시끄럽게 쏟아져 내렸다. 그러고는 요즘 토론토에는 며칠에 한 번씩 눈이 조용히 쌓인다. 눈이 오는 토론토는 추운 듯 포근해서 좋다. 눈의 고장에 온 기념으로 눈에 대한 글을 써 보려고 한다.


고향에서


내 고향은 경상남도 진주다. 이렇게 말하면 어딘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부산 옆옆옆이다. 한반도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도시다 보니 눈이 그렇게 자주 오지 않았다. 진주에 토론토만큼 눈이 왔다면 아마 도시가 마비됐을 것이다. 태어나고 나서의 내 기억에 진주에 눈이 쌓이도록 왔던 건 두세 번 정도였던 듯하다. 초등학교 때는 그런 적이 하여튼 거의 없고, 중학교 시절이 기억에 남는다. 중2 때였는데 학교에 있는 동안 웬일로 눈이 쌓였다. 선생님들은 수업을 빼고 우리가 밖에서 놀게 해 주셨고, 몇몇 선생님들은 등교할 때 학생들이 냈던 휴대폰을 사진을 찍으라며 돌려 주시기까지 했다. (우리 선생님은 안 그러셨다. 아이들의 큰 원한을 샀다.) 우리는 쓰레받기를 바깥에 가지고 나가서 눈을 가득 퍼담았다. 그렇게 많이 내린 게 아니라서 운동장의 모래가 다 섞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장갑도 아무도 없어서 맨손으로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이나 추위 때문에 장갑을 낄 일이 잘 없었던 내 입장에서는 장갑의 필요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왜 눈사람을 만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다음날인가 눈이 또 와서 휴교를 했던 기억이 난다. 즐거운 시절이었다.

고등학교는 경북 안동으로 진학했는데, 그곳은 강원도랑 가까운 데다 내륙지방이라 칼바람이 불고 이따금 눈도 내리는 곳이었다. 눈이 자주 오지 않던 고향에서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눈이 올 때마다 일부러 걸을 때 눈이 있는 쪽을 밟기도 했다.


서울에서


이상한 경험을 했다. 작년 2학기, 기말고사를 얼마 안 남긴 시점이었을 것이다. 난 한 손에 노트북 가방을 들고 다른 쪽 팔에는 숄더백을 맨 채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바람이 나를 따라 역사 안으로 들어왔고, 거기엔 얄팍한 눈송이들이 섞여 있었다. 한숨부터 났다. 이렇게 짐이 많은 날 눈이라니. 생각만으로 섬찟했다. 눈이 왜, 뭐 어때서?

그러고 보니 서울에서 눈은 지저분하게 느껴지기 일쑤였다. 난 잿더미처럼 내리는 눈을 보고 한숨을 쉬며 버스에 올라 탈 때가 많았다. 눈이 오는 날이면 양쪽 팔에 가득 든 짐에다가 우산까지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날 언제나 불쾌하게 했다. 지하철 역에서 섬찟한 생각을 한 그날, 난 학교에 가는 지하철에 운 좋게 앉아 멍하니 생각했다. 눈이 짐스러워지다니. 내 인생은 정녕 망한 거야. 아주 지친 순간들이면 인생에서 날 기쁘게 해 줬던 무언가들조차도 한순간 적대시할 수 있게 됨을 생각하게 된 시기였다. 동시에 그만큼 내가 지쳐 있다는 사실에 힘이 들기도 했다.


토론토에서


눈이 오던 요 며칠은 업타운이든 다운타운이든 캠퍼스든 동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캠퍼스 잔디밭에 눈이 잔뜩 쌓이자 눈이 부셨다. 로렌스 역 일대의 지붕에 하얗게 눈이 앉아 있는 게 다른 동네 같았다. 기온이 낮아져 하늘에서 모인 수증기가 얼어서 내렸을 뿐인데 세상이 달라보이는 경험이 재미있다. 아무래도 여기에서는 서울에서 가지고 있던 조바심이나 내 양팔에 잔뜩 얹혀 있던 짐이 없어서 더 그런 것도 같다. 조용히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있으면 마음도 차분해진다. 더워서 마음이 찐득할 때는 절대 안 들을 것 같은 겨울 느낌의 발라드(예컨대 김동률)도 듣고, 티파니영이 지난해 발매한 크리스마스 시즌송인 'peppermint'를 들으며 의식적으로 페퍼민트 차를 마시기도 했다. 친구 하나가 합창 공연 때문에 서울에서 첫눈에 대한 노래를 연습했다는데 그것도 생각했다. (제목은 기억 안 난다) 그러다가 신이 나고 싶으면 캐롤 앨범도 찾아 듣고. 날씨 덕분에 신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이제 토론토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니까 더 실감이 나는 것 같다. 토론토가 추워지고 눈이 와서 내가 떠날 날이 다가온다는 건 곧 익숙한 서울에서의 삶이 기다린다는 것과도 같으나, 한편으로는 언제 이런 여유를 다시 느낄 수 있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메시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때 여유를 많이 즐겨 놔야지. 페퍼민트 차를 마시면서.


하여튼 눈 좋다. 서울에 가서도 좋아하려고 해 볼 것이다.


오늘의 트리비아


- 사실 내일 시험 있다. 왜 이렇게 여유로운지 모르겠다.

- 좋은 일만 생각해야겠다.

- 이 매거진에 더 쓸 글이 없어지면 이 브런치는 어떻게 될까

- 공부하기 싫은 틈틈이 김영하 <여행의 이유>를 읽고 있는데, 좋은 말이 많다.

- 오랜만에 열심히 읽은 시집도 생겼다. 송승언의 <철과 오크>를 지하철에서 틈틈이 읽었다. 나름 오기 전에 선물 받은 시집인데 이제야 펴보다니. 시들은 심오한데 자꾸 돌아보게 하는 그런 게 있다. 해설을 잘 읽어 봐야지.

- 돌아가면 뭘 하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0. 신선한 당연함 혹은 자기 기만